제2의 인생

[한혜경의 ‘100세 시대’]<6>댄스와 불륜 사이

꿈 꾸는 소년 2012. 12. 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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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6(수) 03: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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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경의 ‘100세 시대’]<6>댄스와 불륜 사이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작년에 개봉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어르신들의 사랑과 죽음을 다룬 영화지만 노년층보다 젊은이들이 더 많이 보고 감동받은 것 같다. 젊은이들은 이 영화를 통해 노년에도 그렇게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노년의 사랑 또한,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항상 아름답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10년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는 여자 어르신 C 씨(78)는 일흔 살 때 동네에 처음 생긴 노인복지관의 댄스교실과 노래교실에 등록하였다. 노래교실도 좋았지만 더 재미있는 건 댄스교실이었다. 춤을 춘다는 게 그렇게 재미있는 건 줄 전에는 미처 몰랐다. 우울하던 마음이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잠도 잘 오고 한결 건강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지르박을 배울 때 짝이 되었던 남자 어르신 J 씨(79)가 C 씨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것이다. 그는 유부남이다. C 씨는 J 씨가 유부남인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댄스교실에 다니던 수많은 여자 중에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J 씨와 친구처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난 후부터는 C 씨의 집에서 동거하다시피 하는 각별한 사이로 발전했다.

C 씨는 J 씨와 그렇게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가슴 아픈 일도 많이 겪었다. 유부남과 사귀다 보니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주는 눈총을 감수해야 했다. 소문을 들은 그의 아내가 나타나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한동안 복지관에 나가지 못한 적도 있다.

하지만 C 씨에게는 가슴 아픈 일보다 행복한 일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 ‘이 나이에도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라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래서 양쪽 집안 자식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나 왔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J 씨의 태도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집에도 오지 않고, 연락조차 하지 않으면서 C 씨를 피하는 것이었다. 결국 한참 만에 나타난 J 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 그만 만나자”라고 했다. 내용인즉 “아내가 암 진단을 받았는데, 이제부터라도 마지막으로 아내한테 충실하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만약에 이대로 아내가 죽어 버리면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에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다”라고 했다.

C 씨는 나이도 나이인지라 J 씨와 언젠가는 헤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유부남과 8년간이나 만남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별을 맞게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차라리 J 씨의 죽음을 맞는 게 덜 슬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런 마음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딸은 “여자가 더 손해라는 걸 이제야 아셨수? 엄마가 다른 여자 가슴에 못질을 해서 벌 받는 거야”라며 독설을 퍼부어 댔다. 딸도 속상해서 하는 소리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너무 섭섭하고 창피했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은 심정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노인복지관은 현재 전국에 200여 개가 있으며, 약 150만 명의 어르신이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노인복지관의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댄스교실이다.

댄스가 어르신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억눌렸던 몸과 마음을 해방시키고, 표현력도 키워 주며, 남들과의 어울림을 통해 외로움도 달래 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댄스교실에서 남녀 어르신 간의 ‘잘못된 만남’이 자주 발생하고 그래서 잡음도 많다는 점이다. W노인복지관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 중에는 ‘그동안 참고 살았는데 이 나이에 못할 게 뭐냐?’라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상대가 유부남, 유부녀인 줄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교실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저는 어르신들이 이러는 거 사회 분위기 탓도 있다고 봅니다. 신문이나 TV를 보세요. 요즘 얼마나 성적(性的)으로 혼란스럽습니까? 중년 남녀들 바람 피우는 것 보면서 ‘쟤네도 그러는데 우리는 왜 못 하냐? 내가 뭐 국회의원 출마할 것도 아니고…’ 이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댄스처럼 어르신의 기운을 ‘업’ 시키는 프로그램보다는 명상이나 국선도처럼 기운을 내려놓는 프로그램이 더 많아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르신들이라고 해서 항상 기운을 내려놓아야 하는 건 아니다. 어르신들도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다. 이 점에서 댄스교실은 누가 뭐래도 좋은 프로그램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댄스는 좋지만 ‘불륜’은 좋지 않다. 그건 엄격한 룰을 지키면서 힘들게 배운 춤과 겉으로만 자유로워 보이는 ‘막춤’의 차이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동작 하나하나를 익히기 위해 힘든 훈련을 하고 부자유를 느끼며 배운 춤일수록 오래 출 수 있다. 그런 춤이 더 자유롭고 만족감을 준다. 아무렇게나 추는 ‘막춤’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댄스와 불륜 사이는 멀수록 좋다.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본 젊은이들은 남자 주인공 김만석 할아버지가 여자 주인공 송이뿐 할머니에게 ‘그대’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한다. ‘당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죽은 아내뿐이라고 생각하는 김 할아버지 나름의 ‘사랑 규칙’이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와 닿았던 것일까?

모든 사랑에는 룰과 예의가 필요하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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