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명수의 사람그물] 염치를 모르는 사람만 승자가 되는 사회

꿈 꾸는 소년 2014. 3. 11. 06:00
[이명수의 사람그물] 염치를 모르는 사람만 승자가 되는 사회
한겨레
이명수 심리기획자

세 모녀 자살 사건 이후 걸핏하면 눈물이 나온다.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삶이 가슴 아파서, 이런 사회의 나이 먹은 구성원이란 사실이 부끄러워서, 서러워서, 분통이 터져서 그렇다.

있는 복지제도를 몰라서 자살했을 것이라는 근엄한 교시가 떨어지자, 찾아가는 복지를 내세운 전시성 구호와 대책이 봇물 터지듯 한다. 일과성 호들갑이 되리란 걸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아는데 거기에 무슨 반응을 하나. 자살세 신설해서 자살도 방지하고 그 재원으로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겠다는 대책이 안 나오는 것만 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참담하고 무기력하다. 기본소득제 같은 건강한 논의조차 멍한 상태로 듣게 된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넣은 봉투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쓴 짧은 유서는 통곡처럼 눈을 찌른다. ‘정말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악다구니 쓰듯 이 사회를 저주하고 원망했더라면 남아 있는 이들의 죄의식이 조금 덜했을까. 최소한의 염치와 자존심마저 이방인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사회라니, 기막히다.

흔히 염치가 사라진 사회라고 개탄하지만 정확한 진단은 아닌 듯하다. 염치가 사라진 사회라서 문제가 아니라 염치가 특정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사회적 룰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어떤 이들은 염치란 걸 사치로 생각하거나 세상물정 모르는 이들의 어리석은 선택쯤으로 여긴다. 그들은 ‘모든 패악은 우리가 부리고 모든 염치는 너희가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도 당당하게. 염치를 아는 이와 염치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이가 싸우면 승부는 뻔하다. 한쪽은 2인3각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데 한쪽은 혼자 맨몸으로 뛰는 경기다. 한쪽은 규칙대로 하고 한쪽은 자기 멋대로 하는 경기다.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결국 염치를 모르는 사람만 승자가 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밀양이나 강정 같은 현장에서 연대하고 있는 지킴이들이 먹을 쌀과 김치를 부탁하는 글의 첫마디는 늘 ‘염치없고 죄송스럽지만’이다. 그때마다 울컥한다.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서 누군가를 돕는 이들의 먹거리를 부탁하는 게 왜 염치없고 죄송스러운 일인가. 외려 보고만 있는 우리가 염치없고 죄송스러운 일인데, 어떤 이들은 그걸 그렇게 미안해한다.

아픈 노동자들을 위해서 오래 헌신하고 있는 활동가를 만났는데 자신이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부끄러워했다. 3만원 한다는 레슨비도 바이올린을 켜는 시간도 혼자만 살자고 하는 짓 같아서 너무 죄스럽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 바이올린이 그에겐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심리적 산소통 같은데 정작 본인은 염치없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외딴 산골에서 순박하게 살던 부부가 있었다. 우연하게 생명보험을 들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죽어서 보험료를 내지 못하게 됐다. 독촉장이 오자 부인이 회사에 편지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남편이 죽어서 보험료를 낼 형편이 안 됩니다. 용서해 주세요.’ 거액의 보험금을 받아야 할 이가 보험료를 못 낸다고 연신 사과를 한다. 어쩜 회사는 보험료를 면제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의 인사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그런 기이하고 부조리한 풍경 속에 들어앉아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참담한 비극들이 이렇게 반복될 수가 있겠는가.

오래전 혁명시인 김남주는 이런 시를 썼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섬뜩한가. 염치의 존재를 아예 모르거나 깔보는 게 그보다 더 무섭다. 염치를 회복하는 것도 혁명이라면 나는 혁명가가 되고 싶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기사등록 : 2014-03-10 오후 06:40:11 기사수정 : 2014-03-10 오후 10: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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