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주간 ‘배신’은 대한민국 정치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했다. 시작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6월25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면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격정과 분노를 쏟아냈고, 결국 13일 만에 의도한 대로 찍어내 버렸다.
나를 포함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배우 송강호를 일약 유명하게 만들었던 영화 <넘버 3>의 장면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깡패 조필을 화나게 한 것은 자기의 말실수에 대한 어리숙한 부하의 정확한(?) 지적 때문이었는데, 보스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인 것이고, 하늘이 빨갛다고 하면 무조건 빨간 것이라고 거품을 물며, 부하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던 장면은 불의한 자들이 오히려 애용하는 배신의 역설을 관통하는 기막힌 블랙코미디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분노의 위력은 대단했다. 당헌·당규에도 없는 원내대표 몰아내기는 전무후무한 삼류드라마였다. 여당의원들도 대부분 찬성해 놓고 모든 잘못을 유승민에게 덮어씌웠다. 그들이 사퇴를 권고하며 박수친 그 손들은 그 옛날 빌라도가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도 예수에게 죄를 묻고 자신은 책임이 없다며 돌아서서 씻던 비겁한 손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단어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대한민국은 입헌공주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공주로부터 나온다”로 헌법 1조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일까? 대통령은 유승민이 배신자라지만, 자신의 보스인 최고 권력자를 배신할 동기를 그에게서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반대로 보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제거하려는 동기는 너무도 확실했고, 실제로 대통령도 이를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사달을 촉발한 원인이 자신이 야당 시절에 두 차례 찬성했던 법안이었으며, 또 같은 당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에 반기를 든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심판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것은 사적권력의 분노를 합리화하고, 공공성을 덧입히기 위해 국민을 끌어왔을 뿐이다.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했지만, 집권 후 2년 반 동안 제대로 된 사과 한번 없이 주요 공약들을 차례로 파기해온 자신은 이런 비판에 얼마나 자유로운가? 돌이켜보면 남북관계 개선과 복지확대는 당선만을 위해 진보 아젠다를 선점해야 했던 전술적 가면에 불과했다.
대통령이나 여당 정치인들이 그리도 자주 언급하는 국민은 아마 현존하지 않는 듯싶다.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민들 70%가 탄핵에 반대했음에도 정치인들은 탄핵을 국민의 뜻이라고 강변했다. 그때 대구의 한 시민이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 민주당 조순형 대표, 자민련 김종필 대표가 “‘국민의 뜻에 따라 탄핵을 의결했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며 ‘사용금지가처분신청’을 했었다. 이 시민은 이와 함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신적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야 3당 대표가 각각 1원씩, 총 3원을 본인에게 지급하라”고 손해배상 청구소장도 함께 냈다.
박근혜 정부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국가란 존재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권력의 안정을 위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며, 권력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공공성을 훼손한다. 이번 사태 역시 박근혜 대통령은 군주이고, 새누리당은 헌법적 기능과 권한을 스스로 포기한 신하에 불과하다.
이제 남은 것은 국민이다. 국민이 군주의 백성이고 신민이라면 우리는 정말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다시 왕정으로 회귀하는 것이 될 수 있다. 30% 남짓한 철통 지지자들은 신민으로 불림을 반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가 맞고,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라면 군주와 신하의 국가를 배신함으로써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정치의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 ‘배신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배신이라는 표현은 거의 대부분 자신이 배신을 당했다는 피동태 문장으로 사용되고, 능동태로 스스로 배신자임을 자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배신을 능동태로 사용해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배신의 원래 뜻은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지만, 의가 아니기 때문에 저버리는 것이 오히려 정의다. 유승민 의원이 사퇴의 변에서 밝혔던, 지키고 싶었지만 결국 굴복하고만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국민이 지켜내야 한다. 대통령이 국가가 아니라 우리가 국가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