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역사르포] 전남대 정문~금남로
1980년 5월 17일 밤 9시. 총에 대검을 낀 군인이 중앙청 일대를 경비하는 가운데 국무위원들이 국무회의장에 도착했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안건을 의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무회의에서 여성 국무위원인 김옥길 문교부 장관이 잠시 이의를 제기했으나 계엄 확대를 의결하고 8분 만에 끝났다. 그날 밤 11시40분 이규현 문화공보부 장관은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계엄사령관의 포고령 10호가 발령되고, 전국 대학에는 군인이 진주했다. 시위와 파업금지 조치가 내려지는 한편 밤새 야당 정치인과 재야인사, 비판적 대학교수와 학생들이 연행되기 시작했다.
전남대학교 정문. / 이상훈 선임기자
1980년대를 저항하는 시위의 메카, 광주
5·18광주민중항쟁(2002년 1월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정 이후 공식 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지만 보통 이렇게 부른다)의 발원지는 전남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교 정문이다. 과거 대학 정문은 가두시위에 나서려는 대학생들과 이를 봉쇄하려는 전투경찰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경계였다. 정문 수위실은 학생들이 던지는 돌멩이와 화염병, 전투경찰이 쏘는 최루탄이 떨어지는, 말 그대로 전장(戰場)의 한 중심이었다.
기자는 5·18광주민중항쟁이 마무리된 직후인 1980년 7월 전남도청과 금남로, 이곳 전남대를 찾은 적이 있다. 전남대 정문 주변은 35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정문 앞 거리에도 신축 고층건물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단지 그때보다 정문에서 본관에 이르는 나무가 훨씬 무성해졌다는 느낌뿐이다. 정문 수위실은 경비업체 직원이 교내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를 모니터 하는 상황실로 바뀌어 있다. 이곳에서 근무한 지 2년 됐다는 한 직원은 “요즘 대학생들은 학점과 취업 때문에 시위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남 광주는 1980년대를 저항하는 시위의 메카였다. 이후 민주화시대(보통 1992년 문민정부 탄생까지)까지 각종 선언, 이념, 투쟁의 뿌리는 5·18광주민중항쟁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5·18광주민중항쟁은 이곳 전남대 정문에서 시작됐다. 전남대 정문 뒤에 있는 ‘5·18광주항쟁 사적1 기념비’에 35년 전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5·18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면학에 몰두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면서 항쟁의 불씨는 뿌려졌다. 이어 18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전남대에는 7공수여단 33대대가 배치됐다. 공수부대는 유사시 적 후방에 침투해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다. 18일 오후부터 ‘김대중 체포와 전두환 쿠데타’ 소식을 들은 광주 학생들과 시민들은 충격 속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위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원들은 시위 가담여부와 상관없이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연행했다. 반항은커녕 항의할 기색만 보여도 곤봉으로 폭행이 이어졌다. 공수부대 곤봉에 의해 학생·시민들의 머리가 터지고, 아스팔트에 핏물이 고였다. 공수부대원들은 민가에까지 난입해 젊은 남자들은 보이는 대로 폭행하고 연행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에서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계엄군이 맞서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는 희생자 숫자
나중에 확인된 것이지만 2군사령부의 <계엄상황일지>에 따르면 5월 18일 하루 연행자가 대학생 114명·전문대생 35명·고교생 6명·재수생 66명·일반시민 184명 등 405명이고, 이 중 68명이 두부외상·타박상·자상(대검에 의한 부상) 등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광주의 비극은 훨씬 참혹했다. 이후 중요한 사안만 시간대 별로 보자. 5월 19일, 시위군중이 계엄군의 장갑차를 둘러싸자 계엄군이 발포, 고등학생이 총상을 입었다. 이에 분노한 시민 수만명이 “전두환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5월 20일, 사실 보도를 않는 광주MBC 건물이 불에 타고, 광주역에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발포,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5월 21일, 시위 군중은 수십만명으로 늘어나 광주KBS와 광주세무서가 불에 탔다.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사격하자 시민들은 군용트럭과 장갑차를 몰고 인근 경찰서에서 획득한 무기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5월 22일, 계엄군이 광주시 외각으로 철수하고 시민수습대책위와 계엄군이 협상을 시작했다. 5월 23일, 시민수습대책위가 총기 회수작업을 하는 사이 계엄군이 시민이 탄 버스에 총격을 가해 17명이 숨지고, 부상당한 시민 2명을 공수부대원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민들이 다시 흥분하면서 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5월 24일부터 26일까지 시민들은 궐기대회를 열고, 계엄군이 증원됐다. 5월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해 도청을 포위하고 시민군에게 집중사격을 가했다. 이날 새벽 5시10분쯤 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진압작전을 끝냈다. 이로써 비극적인 광주의 10일이 마무리됐다.
1988년 제6공화국에서 이뤄진 국회 광주특위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시민 191명이 숨지고, 852명이 부상했다. 이후 공식적으로 사망자 207명, 부상자 2392명, 행방불명 910여명으로 수정됐지만 지금도 정확한 희생자 숫자는 모른다.
이후 5·18 진상 규명과 학살 책임자 규명 노력이 시작됐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5·18 진상규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1988년 국회 ‘광주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광주청문회를 실시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광주의 혼을 위로할 수 없었다. 결국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전두환·노태우 두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고 1995년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수습단계에 들어갔다.
5·18광주민중항쟁의 마지막 장소인 옛 전남도청과 그 일대는 민주·인권·평화·예술의 장인 국립아시아 문화전당 공사가 한창이다. / 이상훈 선임기자
신군부가 철거한 시계탑, 올해에 복원
이 과정에서 많은 증언과 기록이 모아졌다. 이것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로 묶여져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많은 인권운동가, 정치학자, 역사학자들이 5·18광주민중항쟁을 재평가했다. 그 결론은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이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후 권력누수 기간에 불법적으로 집권을 획책하는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일어난 시민봉기”였다. 이어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희생자 묘역이 조성되고 5·18 민주화운동은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의 시작점인 전남대 정문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항쟁의 마무리 지점인 도청은 완전히 변했다. 원래 옛 전남도청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건립돼 1930년부터 도청 청사로 사용되다 2002년 등록문화재(제16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2005년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옮겨가고 이 일대는 전면적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곳에는 오는 9월을 목표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문화전당)이 들어선다. 도청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5·18 민주광장과 경찰청 등 1980년 당시 역사적 건물과 현장을 아우르는 민주·인권·평화·예술의 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민주평화교류원, 아시아문화교류지원센터, 아시아문화정보원, 복합전시장, 아시아 예술극장 등 많은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비단 문화전당이 아니더라도, 이미 광주에는 5·18광주민중항쟁을 기억할 수 있는 다양한 기념관과 ‘소프트웨어’가 있다. 정부와 자치단체(광주시)가 운영하는 것만 해도 5·18기념문화센터를 비롯해 5·18기념공원, 5·18자유공원, 국립 5·18민주묘역 등이 있다. 또 5·18광주민중항쟁의 현장을 시간대별로 밟을 수 있는 ‘오월인권길’ 등 다양한 답사코스도 마련돼 있다. 사적 1호인 전남대 정문에서 옛 전남도청까지 5월 광주의 현장마다 기념탑이 있어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민주의 함성으로 가득찼던 옛 도청 앞과 금남로는 지금 서구풍 패션과 커피향이 풍기는 젊음과 낭만의 거리로 변했다. 한 택시기사는 “요즘 젊은이들은 행사가 많은 5월에만 잠깐 생각할 뿐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모르고, 또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문화전당 앞에 ‘5·18시계탑’이 복원됐다. 1980년 5·18 당시 광주 참상을 처음 보도한 독일 공영방송 NDR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이 시계탑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계속 전승돼야 합니다. 이 시계탑은 자유의 기념물이자 한국의 민주주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멘트했다. 이 보도를 접한 신군부는 이 시계탑을 철거했는데, 광주시가 올해 이 시계탑을 원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이 시계탑에서는 매일 5시18분 ‘님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5·18광주민중항쟁과 ‘님을 위한 행진곡’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여전히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거부하고 있다. 추도식도 정부와 유족이 따로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6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문화전당 법안은 통과시키고, 민생 법안은 통과시켜주지 않았다’고 야당을 비난했다. 5·18광주민중항쟁을 보는 현 정부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