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수 목사(한울교회)의 야고보서 講解(1) - 기독신문
- 흩어진 사람들<1:1>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받는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主後 60년대 초에 기독자의 실천적 삶을 교훈하기 위하여 쓴 서신으로 看做된다. 이 서신에서 그는 믿음과 행함이 서로 모순되는 반대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양면성임을 강조한다. 그 인사말에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13절)를 문안함으로써 진정한 교회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1. 모이는 교회
야고보가 영적 지도자중의 한 분으로 사역하였던 예루살렘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는 교회의 모습으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였다(행 2:47).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온전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신약교회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는 선교의 선언이었다. 그가 지상에서 신약교회에 남긴 마지막 말씀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權能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선교의 지상명령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스스로 유대인의 장벽과 문화를 넘어 이방인에게로 복음을 들고 나아가지는 못했다. 곧 흩어지는 모습이 없었다.
2. 흩어지는 교회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가 흩어지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을 가하도록 허락하셨다(행 7:58; 8:1~3).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인종과 문화, 국경과 종교를 넘어 베니게로, 구브로로, 안디옥으로 흩어졌고, 갑바도기니아, 아시아와 비두니아까지 흩어졌다(행 11:19이하). 이렇게 흩어진 사람들 곧 디아스포라(Diaspora)가 로마에까지 간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그곳에 이르기 전에 로마교회를 개척하였다(벧전 1:1). 안디옥에 이방인 최초의 교회가 세워짐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지상교회가 스스로 선교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생명을 구원하는 선교에 소홀하면 강권적인 방법으로 지상교회가 억지로라도 선교케 하신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모이는 교회, 모으는 교회의 모습은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같이, 예수살렘 성전과 같이 장엄하다. 그러나 흩어지는 교회, 나누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부흥하는 교회의 우선 순위가 필요이상의 사치성 교회당을 짓고, 그리고 남으면 기도원 짓고, 그래도 남으면 묘지를 산다.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곧 흩어지는 교회를 소홀히 한다. 야고보의 문안을 받으면서 한국교회는 동토에 떨고 있는 영혼들, 전 국토가 감옥인 북한의 영혼들, 사막의 모래 바람 속에 짐승처럼 사는 저들의 悲痛한 絶糾를 들어야 한다.
□ 사랑의 공동체(4) - 요절 1:8~11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母親이며 동생이냐"고 물으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姉妹요 모친이니라(막3:34~35)"고 말씀하심으로써 살과 피와 뼈를 나눈 혈연적 가족의 개념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형제요 자매의 관계가 형성됨으로 이제는 "낮은 형제(9절)"도 "부한 형제(10절)"도 "새 계명(요13:34)"에 따라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 부한 형제
유대 사회에서 "부한 형제"란 상류 4계층을 指稱하였다. 종교와 정치를 主管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族長들이었던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율법 특히 모세오경을 융통성있게 해석한 장로들의 유전인 "할라카"를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모세오경은 헌법같고 할라카는 법률이나 시행령 같았다.
이 장로들의 유전은 율법의 정신 보다 율법의 문자적 시행에 치우치면서 본래의 율법정신을 歪曲시켰다. 특히 하류계층의 가난한 소작 농부들이나 손노동자들이 쫓아갈 수 없도록 수많은 해석적 規範들을 율법에 追加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은 성문율법이라고 하면서 "할라카"는 구전율법이라고 동등권위를 주장하였다. 그 중에 하나는 안식일에는 마른 무화과나무 열매 하나보다더 무거운 것을 들면 안식일법에 위반이라고 정죄하였다. 또한 안식일에는 응급환자 외에는 일체 치유를 금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존재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음을 밝히시면서 고통을 당하는 병자에게 치유하심으로 안식일을 주는 것이 안식법의 바른 정신임을 교훈 하셨다. 상류사회의 "부한형제"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그들 상류사회의 通念을 따라주지 않는 자들을 "죄인"으로 看做하였고, 이들과 交際하기를 回避하였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勸勉하였다. 서로 사랑, 먼저 사랑을 요구하였다.
● 부한 형제
유대 사회에서는 헤롯이나 로마를 대신하여 일하는 세금관리 곧 "세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민족의 혈세를 받는 파렴치한 사람들로 그 사회에서 냉대를 받았다. 그리고 성차별을 받았던 여자와 마찬가지로 법적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던 12살 미만의 성인식을 하지 않은 아이들이 법률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가지 못했던 소작농부들이나 손노동자들 곧 목수, 석수, 대장간쟁이들이 그 사회에서 억압당했던 하류계층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이 계층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 안에 들어가서도 소외당했다. 야고보는 이들에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높아짐을 자랑하라고 격려하였다. 이는 혈연 공동체가 신앙 공동체로 轉換되었기 때문이다.
성려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된 믿음의 형제들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엡4:2)"을 힘써 지켜야 말씀의 통치를 맏는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미래가 여기에 와 있는 작은 천국의 모습이다.
□ 시험의 뿌리<요절 1:12~15>
시간과 공간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普遍的 사건은 사단(Satan)에게 시험을 받는 것이다. 이 세상은 시험장이요, 사단은 "시험하는 자"(마 4:3)요, 外的인 試鍊과 內的인 誘惑을 이기지 못하면 신앙의 貞操를 蹂躪당한다. "분초마다 시험"(욥 7:18)을 받아도 욥 같이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 시험의 原因
야고보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迷惑됨"(14절)이라고 시험의 뿌리가 욕심에 있음을 밝혔다.
야고보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곧 “자유의 율법”을 언급한다. “자유”와 “율법”은 반대개념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한 본질의 양면성과도 같다. 율법을 듣기만 하는 자나 그것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에게는 율법의 정죄와 구속이 따르지만,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에게는 율법이 제시하는 삶의 원리와 규범과 질서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까닭이다. 율법에서의 자유 율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인간의 삶의 제일차적 제도는 아니다. 율법보다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제 1차적 제도로서 인간에게 “언약”을 주셨다. 태초에 인간은 “언약”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저버리고 타락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 막혔다. 언약제도에 실패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2차적 제도인 율법제도로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바로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는 제사제도이다. 제사제도에 있어 무게가 집중하는데는 제사장 제도도 아니요, 성전제도도 아니요, 제물 자체이다. 바로 이 제물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 이는 이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써 아버지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린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한다. 이런 면에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아버지께로 나가는 길을 보여주는 거룩하며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신실한 성도들은 율법을 통하여 특히 제사제도를 통하여 메시야의 은총을 내다보았다(롬 10:4). 사랑의 종노릇 율법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정죄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율법주의자들은 주로 율법학자들의 율법해석집이었던 “할라카” 곧 “장로의 유전”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율법의 행위”로서는 구원이 불가함을 교훈 하였다. 바울 사도는 단순히 “율법”이 아니라 언제나 “율법의 행위”라고 언급함으로써 유대 사회의 통념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를 정죄한 것이다. 율법 안에 머물려고 하는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된다면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야고보는 “율법의 행위”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행위”만을 언급한다. 이는 진정한 믿음, 생명력 있는 신앙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율법 무용론자나 폐지론자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인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참된 행위를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받아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다. 이제는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랑의 종이 된 사람이다(갈 5:13).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이요, 율법 중의 율법이다(요 13:34).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율법의 정신을 바로 이해한 참 자유인이요
[김근수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8)] 율법과 자유
김근수 목사(한울교회)
2011년 01월 03일 (월) 10:03:25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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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야고보서 1장 23~25절
▲ 김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