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파란만장 70년… 우리 제법 멋지게 살았잖소”
풍족함이라고는 없던 시절,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키는 176cm, 골키퍼로서는 단신이었다. 체력을 키워 약점을 극복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3000번 이상 줄넘기를 했다. 국가대표가 된 후로 일본전에는 목숨을 걸었다. 전쟁이었다. 전력만 단순비교하자면 일본이 한 수 위. 그러나 정신력에서는 밀릴 수 없었다. 그에게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은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식민 지배를 했던 일본을 뛰어넘는 상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맨주먹으로 일어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나는 자랑스럽습니다. 역경을 헤쳐 온 역사가 나의 인생이고 대한민국의 저력(底力)입니다.”
이 전 이사처럼 광복을 맞은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는 현재 34만358명(2015년 추계인구 기준). 전체 인구의 0.7%에 해당한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 70년 역사와 일치한다.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한 신생 독립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키워냈고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등 민주화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동아일보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해방둥이를 심층 인터뷰해 이 중 70명을 선정해 소개한다. 이들이 가슴속에 묻어뒀던 희로애락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이 꿈꾸는 한국의 미래를 듣는다.
▼ “유학생 시절 만난 한국車,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
지나온 70년 희로애락
올해로 일흔 살. 1945년 을유(乙酉)년생들의 삶은 고스란히 대한민국의 현대사다. 그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모여 한국의 희로애락이 됐다.
겨우 다섯 살, 코흘리개 시절에 이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북한군이 큰아버지를 총살한 뒤 물구덩이에 집어넣었다”는 한봉우 목욕협회 사무국장의 기억은 어제인 듯했다. 이승 전 한국무역협회 상무는 “따발총과 죽창, 선혈 등 전쟁의 기운이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다”고 했다. 아픈 상처는 60년이 넘게 흘러도 아물지 않고 있다.
거의 모두가 1960, 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감격스럽게 떠올렸다. 주부인 김순금 씨(여)는 “초등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할 때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너무 감격해 칠판에 ‘고속도로 개통’이라고 쓰면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경준 서울대 산림자원학부 명예교수는 “미국 유학 시절 가난한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수출한 자동차를 봤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은 6·25전쟁에 맞먹는 치욕이자 슬픔, 좌절, 분노로 남아 있다. 이제 여유를 맛볼까 하는 시점에 많은 이들이 정직원에서 용역직원으로 떨어졌고 보수도 줄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서는 걸 보면서 대한민국의 저력을 봤다”고 말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참사 등은 급속한 경제성장의 그늘로 이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구자흥 안양문화예술재단 대표이사는 “경제성장만 추구하다 기본을 소홀히 해 일어난 인재라 안타까웠다”고 평가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희생을 떠올릴 때는 숙연해졌다. 노정선 연세대 교양학과 명예교수는 “5·18민주화운동 때 동료 교수가 붙잡혀 가 취조를 받던 중 죽었다. 고문이 흔한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민주주의란 열매를 쟁취했기에 값진 희생이었다. 이용성 씨(전 기업인)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다. 6·29선언을 듣고 동료들과 부둥켜안고 기뻐했다”고 회상했다. 뿌리 깊은 갈등과 분열은 이들을 한숨짓게 한다. 재미 사업가 김경아 씨(여)는 “좁은 땅덩어리의 한국이 정치적으로, 지역적으로 갈라지고 얼룩진 모습을 보면 유감”이라고 지적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한 자극제였다. 탤런트 임현식 씨는 “월드컵 때처럼 우리 국민이 하나로 뭉쳐 에너지를 뿜어본 순간을 본 적이 없다. 당시에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며 미소 지었다. 여성 해방둥이들은 2012년 박근혜 후보가 첫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 “행복한 대한민국… 손주들 어깨 쫙 펴고 살았으면” ▼
다가올 미래를 위한 희망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젊은이들과 함께 유라시아 친선 특급열차를 타고 러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그 아이들은 열등감이 없고 활달하고 개방적이었으며 자신감 있고 당당했다. 그 아이들의 성장을 보면서 우리가 살아온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김석우 21세기 국가발전연구원장(전 통일원 차관)의 말이다. 나머지 69명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전쟁과 빈곤 등 갖은 역경을 겪었지만 모두 극복해 번듯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는 긍지가 남달랐다.
젊은 시절 고비마다 감당하기 힘들어 주저앉고 싶었던 과거는 여전히 새삼스럽다. 구본국 전 삼성전자 고문은 “사회도 기술도 정신없이 변하다 보니 그걸 따라가기 위해 참 많이 바빴다”고 회상했다. 임립 임립미술관 관장은 “우리는 광복 전 유교 사상과 경제 발전 이후의 현대 문명 사이에 낀 ‘샌드위치 세대’이다. 그래서 두 세대가 충돌하는 걸 볼 때는 아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금은 스스로가 대견하다. 한현수 전 현대중공업 상무는 “민주화 시위에도 참여했고 산업역군으로 경제 발전에도 기여했다. 우리가 변화를 이뤄냈다는 생각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한약방을 운영하는 곽종목 씨는 “예전에 비해 얼마나 좋은 날을 살고 있는지 느끼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후손들이 행복한 사회.’ 이들이 바라는 미래의 대한민국이다. 무엇보다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태어나면서 분단에 맞닥뜨렸던 이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죽기 전 소망인 셈이다.
고향이 함흥인 주부 송기숙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통일이 되면 고향집에 꼭 가보라’고 하셨다. 3, 4년 안으로 평화 통일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이무석 이무석정신분석연구소장은 “지역갈등, 남남갈등 등 온갖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적 응집력부터 키우자”며 사회 통합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정치부터 안정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전직 회사원 김용규 씨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거짓말과 눈속임으로 국민을 실망시키는 일은 더는 없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젊은 세대의 일자리 부족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컸다. 박명희 캐리커처 작가는 “우리가 젊을 땐 나라가 성장하는 시기여서 그랬는지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지가 보였다. 지금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나경자 한화생명 파이낸셜 플래너(여)는 “10년 후엔 젊은이들이 행복한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편집국 종합
※ 이번 심층인터뷰는 100명이 넘는 어르신을 대상으로 진행했지만 지면 사정 때문에 일부 사연은 싣지 못했습니다. 선뜻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와 양해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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