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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村(시골의 마을)의 風磬소리 - 김임수[전우회 서부지회]

꿈 꾸는 소년 2020. 11. 20. 19:19

 고향은 조건 없는 그리움(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다. 環境이 초라해도 相關없다. 고향은 꿈과 희망의 搖籃(사물의 발생지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周邊은 동화 속의 樂園처럼 아름답다. 동쪽 공원에 있는 한 오백 년 樹齡의 느티나무 가지에는 새들뿐만 아니라 새들뿐만 아니라 박쥐들도 모여든다. 西山의 落落長松(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가 소나무)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白鷺 한 쌍이 깃드는데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운 그곳에서 寫生공부를 하던 때가 그립다(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학생 수에 비해 턱없이 교실을 代身한 野外學習을 하면서 선생님께서 사두봉의 傳說이나 도깨비 굴 이야기를 드려주실 때 興奮의 도가니(흥분이나 감격 따위로 들끓는 상태)에 빠졌던 우리들, 고향의 초등학교가 자랑스럽고 나의 선생님이 제일 훌륭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네댓은 보통이었다. 형제들이 많으면 아이들 싸움에서 主導權을 行事하는데, 그러므로 나의 7형제의 勢力은 대단한 權威를 創出했다.

 그때 동네에느 아이들이 많았다. 자고 나면 이집 저집 친구 집에 人줄(부정한 것의 침범이나 접근을 막기 위하여 문이나 어귀에 건너질러 매거나 신성한 대상물에 매는 새끼줄. 아이를 낳았을 , 담글 , 잡병을 쫓고자 , 신성 영역을 나타내고자 때에 사용한다. 줄이 있는 곳은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한다.)이 쳐지면 아이가 태어난 證據이다. 숯과 목화솜이 꽃히고 고추가 매달린 새끼줄이 오두막(작고 초라한 집) 출입문에 나타나면 우린 한동안 친구 집에 갈 수 없었다.

 

 내가 살던 고향의 文化는 窮塞하고 文明은 뒤쳐진 村落이었지만 밤하늘에 보석 뿌려 놓은 듯 燦爛한 은하수 벌판을 보며 蜃氣樓(홀연히 나타나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되다가 사라지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일이나 현상. 공중에 있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아무런 근거나 토대가 없는 사물이나 생각.)를 쫓아 꿈꾸던 浪漫(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그런 분위기.)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綠陰芳草 숲에 새들이 모여들고 山野에는 꽃이 피고 지는 고향에서 허물없는 동무들과 뛰놀던 시절이 그립다. 마치 고된 훈련과 배고프던 군대시절의 추억을 재미나게 자랑하듯 말이다. 지금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의 추억의 반가움을 體驗할 수 있는 사탕수수이지만, 여름이면 마당가에서 櫛比한 단 수수(사탕수수의 방언) 나무를
꺾어 껍질 벗기고 단물 삼키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향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暴雪이 아니고 섣달그믐날 함지박에 쌓이는 쌀가루처럼 밤새 조용조용 소리 없이 내린 걸음마 배우는 아이의 키만큼 쌓인다. 눈이 내리면 대나무를 쪼개 스키를 만들어 위험한 新作路(새로 만든 길.크고 넓은 .)를 자동차와 어울려 경주하듯 달린다. 구슬치기, 제기차기, 연 날리기 하느라 손등이 갈라져 피가 배어나고 콧물이 발등을 찧을 듯 危殆로운 꼴이지만 촌놈은 궁색한 놀이 문화에 푹 빠진다. 초가지붕 추녀에 달린 고드름 따 들고 칼싸움에 沒頭하다가 아버지께 惹端 듣던 시절의 소담스런 추억도 참 그립다.

 

 사두봉 傳說의 根源地인 연못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뽀족이 높은 종탑을 가진 양철지붕의 교회가 있었다. 소년은 연못에서 왕잠자리 잡는 놀이에 心醉해 교회는 별 興味를 못 느꼈는데 어느 날 친구가 받아온 초코릿이 어찌나 먹고 싶은지 머묵머뭇 교회를 찾아간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아무리 그러하더라도)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

 

 교회에서 들여오는 찬송가는 학교에서 배운 동요와 다른 生硬(익숙하지 않아 어색하다.)한 메로디이지만 神秘로운 끌림에 스르르 교회 안으로 드어선다. 그곳에는 학교의 친구들이 주일학교라는 단체에 모이고, 걸개그림(건물의 따위에 있도록 그린 그림.)으로 설명하는 전도사님의 재미있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漠然(갈피를 잡을 없게 아득하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렴풋하다.)한 憧憬心(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생긴다. 성경책의 깊고 奧妙(심오하고 묘하다.)한 理致를 모르다가 長成(자라서 어른이 됨. 발전하여 커짐)하면서 성경 말씀을 통해 藝術이 있고 哲學이 숨 쉬며 豊盛한 文學을 접하는 契機가 됐다. 예컨대 '벤허'나 '십계' 등 성경을 素材로 한 영화,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화 '최후의 晩餐'을 접하며 無窮한 역사를 체험하면서 天地創造에 대한 敬畏心이 우러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교회의 종탑에는 무쇠로 만든 肉重한 종이 매달려 있어 예배시간을 알릴 때 우리는 우렁찬 종소리가 십리 밖에서도 들린다. 종지기가 종을 치기 위해서 아스라이(보기에 아슬아슬할 만큼 높거나 까마득할 정도로 멀게.) 높은 鐘身(종의 몸체.)의 회전을 實行하는 동아줄(굵고 튼튼하게 .)을 잡아당기는데 우리들이 잡아당기면 꼼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거운 종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한참(시간이 상당히 지나는 동안.) 후 지방문화제 造成(무엇을 만들어서 이룸.)과 관련하여 교회도 종탑도 사라졌다는 소식에 所重한 추억의 喪失感에 허전(무엇을 잃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같이 서운한 느낌이 있다.)함을 느껴졌다.

 

 최근 아내와 발칸반도를 旅行하면서 슬로베니아의블레드 호수 섬에 있는 성모마리아 승천성당에서 동아줄을 잡아당겨 종을 세 번 치며 所願(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람.)을 밀면서 그때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고향에서 크리스마스시즌이 오면 都會地의 형들이 찾아와 예수님 誕生을 紀念하여 연극을 가르쳐 주었는데 친구들은 配役에 무척(다른 것과 견줄 없이.) 신경을 쓴다. 選好하는 配役은 예수님이고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등의 배역은 無難(별로 어려움이 없다.)한데, 유다 役割은 서로 忌避한다. 實際 연극의 絶頂은 예수님과 유다의 상징성인데도 예수님을 팔아먹은 悖倫的 弟子 유다에 대한 敵對感이었을 것이다.

 

 연극연습이 끝나면 선물보따리가 쏟아진다. 戰後 荒廢해진 대한민국에 세계 각국의 선교단체들이 보내온 구호물품이 疊疊 산골의 우리들에게도 配給되었던 것이다. 구호물자를 받아든 우리들의 表情은 歡喜의 행복이다. 未知의 나라에 보낸 물건이지만 선진국 아이들의 문화가 묻어나는 珍奇(진귀하고 기이하다.)한 선물을 차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우개 달린 연필을 받으면 잘못 쓴 글자는 연필 꽁무니의 지우개로 깨끗이 지울 수 있다. 특히 연필깎기 받은 친구는 연필을 넣고 돌리면 끝이 뽀쪼한 예쁜 연필로 변하니 神奇(믿을 없을 정도로 색다르고 놀랍다.)하여 자꾸 깎으면 몽당연필이 된다.

 

 유통기한이 없던 그 시절에 음식물도 나눠 먹었는데 건빵같이 바로 먹는 과자와 초콜릿은 所重한 선물이다. 生前 처음 접하는 분유 덩어리(우랜 운송기간으로 분유가 돌덩어리처럼 굳었다)는 뭔지 모른 채 어떻게 먹을 줄 몰라 망치로 덩어리를 깨서 밥솥에 쪄서 무르게 녹여 먹던 해프닝도 기억난다.

 

 찬송가를 부를 때 풍금을 치던 質朴한 여인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녀는 하얀 적삼에 검은 치마 차림으로 단정히 앉아 풍금을 쳤다. 성가대와 하모니를 이루던 伴奏의 아름다운 메로디가 귓전에 맴도는데 그때 풍금 치던 누님은 지금도 고운 자태로 살고 계시는지 그리워진다.

 

 크리스마스 前夜를 예배와 연극으로 밤을 새우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려 떼지여 새벽송을 다니면서 東方博士의 기분도 낸다. 함박눈이 내린다면 최고의 성탄일로 운치를 더한다.

 

 두메산골 추억이 묻어나는 향촌의 풍경소리를 나는 心胸에 보관하다 생각날 때꺼내서 들어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