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試鍊의 땅 江華島 - 김영남[ 전우회 동부지회. 제166호. 2016.7.1]

꿈 꾸는 소년 2020. 12. 21. 10:31

 조선시대 강화도 南端 海峽을 지켜든 초진지 입구 언덕에는 크고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 늘어진 가지에 버팀목을 받쳐 놓았는데 문화해설사는 特異한 점은 찾아보라고 한다. 큰 가지 한쪽에 두 뼘은 될 만한 곳을 콘크리트 모양새 보강재로 메운 흔적이 보인다. 신미년 미군과 전투 시 포격을 당해 생긴 포탄 자국이다.

 

 軍艦에서 초지진에 艦砲사격 후 上陸하는 미군과 조선군은 戰鬪가 벌어졌다. 솜을 넣고 여러 겹 누빈 조선군의 면 갑옷은 爆發하는 砲彈에 불붙기 좋은 불쏘시개였다.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물살 빠른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自殺 行爲였다. 參戰記를 쓴 한 美軍 兵士는 陣地에 조선군의 屍體가 쌓인 光景(벌어진 일의 형편과 모양.)을 보고, 이 전투는 虐殺(가혹하게 마구 죽임.)이라 表現하고 있다. 劣惡(품질이나 능력, 시설 따위가 매우 떨어지고 나쁘다.)한 무기에도 상륙하는 미군과 白兵戰을 벌였지만 조선군 戰死 343명, 미군 3명이었다. 朝鮮의 홍이포(砲)는 쇳덩이를 쏘는 砲丸(대포의 탄알.)으로 사거리가 600m였고, 미군 艦砲는 두 배인 1200m일 뿐만 아니라 목표물에 떨어지면 폭발하는 砲彈이었다. 命中率 높고 發射速度가 빠른 신형 대포에 防壁은 힘없이 破壞되었다. 辛未洋擾는 145년전 사건으로 어른과 아이싸움 같은 전쟁 역사다.

역사. 조선 시대에,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요새. 신미양요병인양요 때의 격전지로,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다.

☞ 표현 : ①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냄.

            ②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사물의 이러저러한 모양과 상태. 

☞ 백병전 : 칼이나 , 총검 따위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 

☞ 방벽 : 밖으로부터 쳐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쌓은 . 

☞ 신미양요 : 조선 고종 8(1871) 미국 군함이 강화도 해협에 침입한 사건. 대동강에서 불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문책과 함께 조선과의 통상 조약을 맺고자 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이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었다. 1866년 대동강으로 無斷 侵入한 미국국적 商船 제너럴셔먼호는 武裝한 船舶이었다. 처음에는 友好的이었으나 배가 坐礁되면서 선원들과 衝突하여 조선인 여러 명이 죽었다. 火攻(전쟁 때에, 불로 적을 공격함.)을 당한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은 全滅하였다. 이후에도 조선 朝廷은 천주교도들을 處刑하고 프랑스인 신부들을 殺害하였다. 이 사건을 糾明한다는 빌미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侵入하는 丙寅洋擾를 겪었다. 이들 나라는 조선에 자국민들이 살해당한 原因 규명과 通商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전쟁으로 커진 것이다. 미국의 침입에 올 것이라는 사전 徵兆를 알았고 나름대로 준비했지만 재래식 무기는 相對가 될 수 없는 전투였다.

☞ 조정 :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거나 집행하는 . 또는 그런 기구. 

☞ 규명 : 어떤 사실을 자세히 따져서 바로 밝힘. 

☞ 침입 : 침범하여 들어가거나 들어옴. 

☞ 통상 : 나라들 사이에 서로 물품을 사고팖. 또는 그런 관계.  

☞ 병인양요 : 대원군의 가톨릭 탄압으로 고종 3(1866)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 병인박해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가 톈진() 있던 로즈 제독에게 진상을 보고함으로써 일어났는데, 프랑스 함대는 40 만에 물러갔다. 

 

 미군이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조선의 入場에서는 決死 抗戰하여 異樣船을 물리친 사건으로 認識되었다. 그 후 대원군의 鎖國政策은 더욱 강화되었고 국제 政勢는 列强들의 식민지 확보 쟁탈전의 激動期가 된다.

 

 초지진 전시각의 홍이포는 當時 전투에서 사용된 것이라 한다. 태평양전쟁 末期 日帝는 物資가 부족하여 寺刹의 鐘 甚至於 가정집의 놋그릇까지 徵發해갔는데 그때의 珍品(진귀한 물품.)이 남았다는 것은 幸運이다. 일본군 육군대위 아라이가 자기집에 所藏(자기의 것으로 지니어 간직함. 또는 물건.) 한 것을 광복 후 장택상 씨가 소장하고 그 아들 장병찬 씨가 寄贈(선물이나 기념으로 남에게 물품을 거저 .)하였다.

☞ 심지어 : 더욱 심하다 못하여 나중에는.  

☞ 징발 : ① 남에게 물품을 강제적으로 모아 거둠.국가에서 특별한 일에 필요한 사람이나 물자를 강제로 모으거나 거둠. 

 

 조선의 신미양요 사건 發生 17년 전인 1853년 이웃 일본도 미국의 武力 示威와 통상압력으로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후 일본은 對處 방식이 우리와는 달랐다. 미국과의 불평등 條約에 憤怒한 세력은 疏外당하던 飜意/(먹었던 마음을 뒤집음.) 下級 武士들이었다. 내부적으로 複雜한 事情이 있었지만 그들이 主導한 明治維新이 성공하면서 封建 질서를 解體하고 근대화된 정치사회 體制로 改革하여 急速한 산업화를 이루었다. 250년을 執權했던 莫府政權의 勢力 交替가 이루어진 것이다.

☞ 무력 : ① 군사상의 .  ② 때리거나 부수는 따위의 육체를 사용한 . 

☞ 시위 : ① 위력이나 기세를 떨쳐 보임.많은 사람이 공공연하게 의사를 표시하여 집회나 행진을 하며 위력을 나타내는 .  

☞ 대처 : 어떤 정세나 사건에 대하여 알맞은 조치를 취함

 

 산업화된 일본은 西洋 세력으로부터 식민지정책을 배워 조선과 중국, 동남아시아 등 周邊 국가를 侵掠하였다. 18세기 말부터 일본은 동아시아에 식민지 確保에 나서면서 주변국가들과 衝突하였다. 청일전쟁 賠償金으로 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를 받아내 러시아를 假想 적으로 러일전쟁에 대비한 군비확장에 着手하였다.

 

 시미양요 전사자 기념탐 앞에서 우리 일행은 묵념 후 쌍충비 맞은편 담장에 둘러싸인 묘들을 보았다. 신미년 전투에서 불에 타고 身元을 알 수 없는 전사자들을 일곱 墓에 合葬한 신미순의총이다. 많은 功力을 들여 가꾸어도 떼가 잘 크지 않고 封墳의 흙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때 가신 분들의 恨이 서려서일까? 그 寃魂을 慰勞하는 廣城大祭가 음력 4월 24일(금년은 양력 5월 30일) 열린다.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의 慘狀을 당하고도 국제 정세를 바로 認識하지 못한 조선 末期 執權 勢力이 나라를 망치게 된 原因은 어디서부터인지 궁금해진다.

 

 當時 性理學은 백성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實學은 개혁자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疲弊한 삶은 사는백성과 나라를 구하려는 趣旨에서 실용적인 서양학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성리학 : 중국 송나라명나라 때에 주돈이(), 정호, 정이 등에서 비롯하고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의 . 입각하여 重視하는 실천 도덕과 인격과 학문의 성취를 역설하였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기에 들어와 조선의 통치 이념이 되었고, 길재정도전권근김종직에 이어 이이이황에 이르러 조선 성리학으로 체계화되었다. 

 

 조선후기 文藝復興時代라 할 수 있는 영조와 정조 시대 蕩平策으로 남인 출신이 登用되었다. 그들 중에는 茶山 丁若鏞, 丁若銓, (연암) 朴趾源 등 實學에 精通(어떤 사물을 깊고 자세하게 앎.)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에 의해 상공업 발전과 국운 上乘의 기회를 맞았지만 정조대왕이 昇遐한다. 후계구도가 脆弱해지면서 어린 임금에게 王大妃, 大王大妃는 垂簾聽政을 한다. 牽制勢力이 없는 外戚의 勢道政治는 腐敗社會가 되면서 많은 民亂이 일어났고 洪景來의 난과 義賊이라 불리던 임꺽정 등이 活動한 時期였다. 천주교는 祖上의 祭祀를 拒否하고 極甚한 迫害를 받았고, 정권 유지에 妨害되는 정적은 天主敎 신자라는 名分만으로 재판 없이 처형했다. 

☞홍경래의 난 : 조선 순조 11(1811) 평안북도 가산군에서 홍경래가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 항쟁. 이듬해 관군에게 진압되었다. 

☞ 탕평책 : 조선 영조 때에,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 

 

 日帝의 植民地 確保 策略이었지만 甲午改革으로 신분제도 폐지, 초등학교 設立, 세금제도 개혁과 新聞 發行 등 세상이 달라졌다. 宣敎師들은 의료기술과 과학기술을 가르치면서 학교와 병원, 교회가 繁昌한다. 萬若 정조 死後에도 實學者를 重用하고 천주교가 生業에 專念, 산업이 발전되었다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을까? 상상해본다.

 

 한강 입구 우리나라의 네 번째 큰 섬 강화도는 古代에서 현재까지의 戰略的 要衝地다. 高麗는 강화해협을 끼고 몽골과 40년간 抗爭하면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으며,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과 戰鬪도 있었다. 江華海峽에 침입한 운양함과 포격전을 벌였지만 초지진은 파괴되고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監視하기 좋고 脫出하기 어려워 연산군과 광해군이 流配당한 섬, 시련의 땅은 지금도 남북으로 對峙한 우리나라 수도 서울을 지켜주는 큰 役割을 하고 있다.

 

 오늘 돌아본 지역은 이 섬의 반절도 못된다. 초지진, 광성보, 전등사 등 남쪽 일부만을 둘러본 것이다. 초지대교와 강화대교 연육교가 개통되면서 이제 섬이 아니다.

 

고인돌 유적지와 정족산성, 단군의 痕跡이 실제로 남아 있는 마니산 塹星團 등은 더 가보아야 할 곳 들이다. 나는 하룻밤을 묶으면서 餘裕로운 역사기행을 하고 싶다. 간척사업으로 농지가 늘어나면서 강화도의 쌀 생산량은 住民 자급량의 일곱 배가 넘는다. 군수는 품질 좋은 섬 쌀을 잘 팔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조선왕조 때 미국과 전투를 겪었지만 6.25 한국전쟁 이후 血盟 사이가 되었다. 한국전재에 參戰한 미국은 敵國이었던 중국과 修交하였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무역규모는 미국보다도 커졌다.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국제 政勢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