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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꿈 꾸는 소년 2011. 9. 12. 23:14

☞ 惡의 平凡性 : 독일 태생의 미국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1906~1975)는 나치의 대량학살을 도운 혐의로 체포된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남긴 名言.

-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라 맡은 일만을 충실하게 해낸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에겐 타인이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다.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와 의미, 그에 따른 타인의 이해 관계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악은 그렇게 평범한 모습을 하고 뿌리를 내린다.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학살된 유태인은 약 600만 명이었다. 유태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학살 대상이었다. 워낙 대규모로 저질러진 학살이라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2003년 9월에 밝혀진 극비문서에 따르면 나치 정권은 2차 대전 개전 이듬해인 1940년 1월부터 1941년 8월까지 독일 각 병원에 수용돼 있던 지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 27만5천명을 학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몬 바이센털 센터의 R.A 쿠퍼 소장은 “나치정권은 장애인 학살의 살인기술을 연마하고 정당화하는 도구로 약용했다.”고 비난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과 관련하여 자주 논의되는 인물이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이다. 그는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중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중 수백만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전범이었다. 그는 독일이 패망할 때 독일을 떠나 도망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약 15년간 숨어 지내다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비밀조직에 체포돼 9일 후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그는 1961년 4월 11일부터 예루살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그해 12월 사형판결을 받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1963년에 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뉴요커라는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과정을 취재한 아렌트는 이 책에서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사고력의 결여’는 어떻게 발생하며 무엇이 그 ‘결여’를 메워 주는가? 히틀러의 병사들에게 “명예”는 곧 “충성”이었고, ‘충성’은 곧 ‘명예’였다. 또 히틀러 일당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역사적이고 웅대한 의미를 부여하게끔 병사들을 세뇌시켰다. 2천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일이라는 걸 주입시켰다. 그리하여 병사들이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라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내 어깨에 걸린 역사적 책무가 참으로 무겁도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아렌트가 송고한 기사는 곧 미국 전역에 걸쳐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악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인물의 “악마성”을 부정하고 악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학살을 저지를 당시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엔 매우 착한 사람이었으며,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수행 과정에서 어떤 잘못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아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착한 사람이 저지른 악독한 범죄라고 하는 사실에서 연유되는 곤혹스러움은 인간의 사유(thinking)란 무엇이고, 그것이 지능과는 어떻게 다르며, 나아가 사유가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가 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하게 만들었다.

혹 학살의 정교한 분업 시스템이 그런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는 데에 일조한 건 아니었을까? 크게 나누어 명령을 내리는 자, 세뇌를 하는 자, 집행하는 자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해 자기 나름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갖게 될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자와 세뇌를 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의 끔찍한 현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조치하시오’라는 우아한 말 한마디, 또는 ‘국가와 영광을 잊지 마라.’는 애국적인 말 한마디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그들의 손엔 피 대신 향기로운 술잔이 들려 있을 것이다. 직접 살인을 하는 병사들도 그 순간 명예와 충성과 역사적 책무와 국가의 영광이라는 주문만 외우면 되는 것이고, 그들의 살인 행위도 단추 하나만 누르면 해결되는 것이라 죄책감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심리적 과정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여러 가지 다른 장치들이 개입된다. 이삼성은 학살의 집행자 또는 하수인들은 자신들이 잔혹행위에 개입해 있는 그 ‘현실의 어처구니없음을 어떤 형태로든 어느 정도는 인식하게 마련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된 공백을 환상으로 메우려 하는 과정에서 ’위조된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현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부정하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이 등장한다. 그 중의 하나가 베트남전쟁의 경우 군인들이 애용한 헤로인과 마리화나 등의 마약복용이었다. 독일군들은 유태인 수용소에서 술과 고전음악을 즐겼으며 수용된 여성들에 대한 변태적인 성적 학대를 즐겼다. 이런 수단들을 통해서 학살의 하수인들은 스스로 ‘심리적 불감’ 상태를 불러일으키며 정신적 공황을 메우려고 했다.

이삼성은 ‘심리적 불감’은 학살과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자신들의 현실을 비현실화하는 심리적 과정과 연결돼 있으며, 이 과정엔 크고 작은 이데올로기와 도구들이 동원된다고 말한다.

나치스의 경우는 ‘새로운 독일적 냉혹성(new spirit of german coldness)을 영웅시하는 이데올로기도 한몫을 했으며, 고전음악을 즐기는 것과 같은 심미적 행위도 학살과 죽음이라는 현실과 그 하수인에게 불가피하게 따르는 죄의식을 초월해 보다 효과적이고 냉혹한 학살 기계로 자신들을 적응시키는데 중요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학살의 하수인들은 다른 한편으로 현실에서 직면하는 어처구니없는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행위들을 넘어서서 그것들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다른 높은 차원의 목표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부조리한 행위에 개입해 있는 자신을 용서하려 하는 자기합리화의 메커니즘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베트콩들의 시체 수를 확인하기 위해 시체마다 귀를 잘라 모으는 짓을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베트남전쟁에서도 수많은 아이히만들이 존재했다는 걸 말해 준다. 노인, 여자, 어린아이 등 민간인 347명을 학살한, 68년3월 16일 미라이 학살사건이 좋은 예일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즉 기술적인 일만 성실히 수행했다. 이게 곧 아이히만의 대답이기도 했다. 닐 포스트먼은 “아이히만의 대답이 하루에 미국에서만도 5천 번 이상 나오고 있을 것이다. 즉 내 결정의 인간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이다. 담당자는 관료주의의 효율성을 위해 맡은 역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질뿐이며, 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아이히만의 문제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입장은 에리히 프롬에 의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아이히만과 관련, 에리히 프롬은 ‘관료주의적 인간’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프롬은 관료주의적 방법은 인간을 물건처럼 다루고, 수량화와 통제를 보다 쉽고 값싸게 하기 위해서 이 물건을 질적인 면보다는 양적인 면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프롬이 관료주의적 인간의 전형으로 든 인물이 바로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과 그의 동료들이 갖고 있었을지도 모를 새디즘적인 경향은 관료들에게는 단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일차적인 요소는 “인간적인 감응의 결핍과 규칙에 대한 숭배”였다는 것이다.

프롬은 아이히만이 조직화된 인간의 상징이며 우리 모두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이히만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가 스스로 모든 것을 자백하고도 자신의 완전하고 선한 신념에 의거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프롬은 “조직화된 인간은 불복종의 능력을 잃게 되고 심지어 자신이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 역사상 이 시점에서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프롬이 모든 관료주의자가 아이히만과 같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관료의 지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성격논리학적 의미에서의 관료는 아니며, 관료주의적 태도가 대개의 경우 그 인간 전체를 지배하여 그의 인간적인 측면까지 제거해 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롬은 이같은 전제를 하면서도 관료주의 체제엔 아직도 수많은 아이히만이 있다고 말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수천의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는 점뿐이라는 것이다. 병원의 관료가 환자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한다는 그 병원의 규칙 때문에 중환자를 거절 했을때, 그의 행동은 아이히만이 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관료주의적 규약의 어떤 조항을 위반하기보다는 빈민을 굶주리도록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사회사업가의 행동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료주의적 태도는 단지 관리들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사. 간호사. 교사. 교수들 속에도, 많은 부부관계와 친자(親子) 관계 속에도 살아 있다. 일단 살아있는 인간이 하나의 숫자로 격하되면 관료주의는 철저히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에 비례할 만큼의 지독한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대상물에 대하여 아무런 인간적인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료는 새디스트보다는 덜 포악하지만 더욱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심과 의무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란 바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과 공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태인 학살에 가담한 독일인들의 심리상태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2년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 쓴 ‘평범한 사람’들은 “동료간의 압력, 출세주의, 조건 없는 복종”이 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홀로코스트에 동참하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1996년 에 나온 대니얼 조나 골드헤이건의 ‘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집행인들’은 브라우닝의 주장에 정면 도전하면서 독일의 병리현상인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에서 원인을 찾았다. 즉, 모든 독일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특성을 잘 읽은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독일인과 유태인 대학살’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50만부 이상 팔려 나갔다.

골드헤이건의 주장에 대해 노먼 핑켈스타인은 전체주의적 지배가 독일인들을 타락시킨 것이지 독일인들이 원래 그런 건 아니라는 반격을 가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인들의 무관심은 전쟁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독일 병사들에게도 책임을 묻긴 어려우며 모든 책임은 나치의 관료체제에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른 대량 학살 사례를 열거함으로써 유태인 학살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주장까지 폈지만, 이는 인류 역사 이래 유태인 학살과 같은 대량 학살은 없었다는 다른 학자들의 반격에 부딪혔다.

그런가 하면 2000년에 나온 에릭 존슨의 나치테러는 독일인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침묵은 통탄할 일이지만, 이방인들로 여겨지던 그들 유태인의 운명에 대한 도덕적 무관심과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침묵은 이해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제이 고넨의 “나치 심리학의 뿌리”는 골드 헤이건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독일의 신화와 역사가 사악한 유대인이라는 ‘집단 환상’을 키워왔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명령에 복종한다는 이유로 수직적 명령체계나 관료적 타성 때문에 집단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좀더 두고 지켜볼 일이지만, 관료주의에 대한 경고는 경청할 만하다. 프롬은 “우리의 양자택일의 문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관료주의와 휴머니즘 사이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과연 그럴까?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관료주의와 휴머니즘이 과연 현실적인 양자택일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진실을 인식하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라는 그의 말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자꾸 “현실”이라고 말하고 강조하는 그 굴레가 우리를 관료주의적 삶의 체제에 자꾸 묶어 놓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모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을 사랑하고 존중하되 조직의 부정과 불의에조차 따르는 조직의 노예가 되지 않는 건 영영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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