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

[기독논단] 바벨탑 욕망 버려야 희망이 있다

꿈 꾸는 소년 2012. 1. 1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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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논단] 바벨탑 욕망 버려야 희망이 있다
2011년 02월 22일 (화) 09:54:41 소강석 ekd@kidok.com
   
  ▲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과테말라에 있는 중세 수도원에 가 본적이 있다. 과테말라는 한 때 스페인의 점령지였다. 그래서 중세 때부터 엄격한 규율을 전통으로 하는 가톨릭 수도원이 있었다. 높은 담을 중심으로 왼쪽은 여자수도원, 오른쪽은 남자수도원이었다.

그리고 남자수도원에는 여자가, 여자수도원에는 남자가 절대로 못 들어갔다. 다만 1년에 딱 한 번 남자 수도사들이 여자수도원에 들어가 강의를 한다. 그런데 남자 수도사들이 강의를 하고 가면 몇 달 후에 배가 불러오는 수녀들이 생겼다. 당시 수녀가 임신을 하면 사형을 시켰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까지도 함께 사형시켰다. 양 다리와 양손을 밧줄로 묶어 놓고 위에서 소금물을 머리와 이마에 떨어트려서 물고문으로 죽였다. 2~3일을 버티다가 대부분 3일 안에 죽는다. 이렇게 참혹한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지역에 지진이 났다. 땅이 갈라지면서 파묻힌 수녀들의 몸속에 아이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고 그들이 써 놓은 일기가 공개되면서 비밀이 드러났다. 지진이 아니었더라면 수도원의 비밀은 영원히 묻혀졌을 것이다.

똑같은 방법은 아니지만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가톨릭의 관습과 문화에도 적용되고 있다. 어느 기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가톨릭은 신부가 죽으면 동료 신부들이 가서 서재를 비롯한 개인 사물들을 정리한 후 평신도들이 뒷정리를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만에 하나 규율과 어긋나는 사적인 편지나 일기, 사진 등 불미스러운 것들이 나올까봐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톨릭은 성당 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럽거나 어두운 일은 바깥으로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관습과 전통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오늘날 가톨릭이 사회에 좋은 이미지 메이킹이 되었던 것은 이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를 숨겨왔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은 언론 관리에 철저하다. 이것은 가톨릭 뿐 아니라 불교도 마찬가지다. 불교계가 언론 관리에 얼마나 힘을 기울이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어떤가? 공중파 방송을 통해서 개신교의 치부가 드러났던 것은 대부분 내부고발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교회 재정을 오래 맡았던 장로가 담임목사와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재정장부를 언론에 전달했다. 그래서 교회 재정관리 시스템이 공개되고 사회적 기준과 잣대로 판단하면서 난도질당하는 우를 범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치부가 드러났는가. 오늘날 개신교 안에는 루터와 칼빈(?)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부터 회개하고 정화해야 한다.

최근 강남의 S교회 사건도 마찬가지다. 마치 한국교회 전체가 그런 것처럼 우리 개신교는 언론의 포화를 맞았다. 더욱이 최근 한국 교계를 보면 더욱 씁쓸하다. 승리한 쪽에서 패자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주고 패자 역시 섭섭하더라도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 덕을 세우고 흐름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계속 폭로전을 일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도 우리 자체 내에서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를 왜 교계 뿐 아니라 일반 언론에까지 폭로하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이 포용의 덕이다.

개인의 이익이나 목적보다 한국교회 전체, 즉 공공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힘을 다 합쳐도 이슬람 및 타종교의 도전과 안티 세력들의 공격을 감당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런데도 이런 내분을 자초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다. 한국교회는 지금 세상이 기독교를 어떻게 비하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이미지가 갖고 있는 힘이 얼마나 파괴력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도 서로 비방하고 공격하는 것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순수한 개혁문제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명분은 개혁이지만 행크 해네그레프가 ‘바벨탑에 갇힌 복음’이라는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나도 모르는 기득권을 향한 탐욕이며 바벨탑의 욕망 때문은 아닌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파괴적 폭로와 법적 고발 등으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다. 교회 안에서 해결할 문제를 외부로 드러내고 언론에 제보할 뿐 아니라 서슴없이 사회 법정까지 끌고 간다. 그러한 풍토는 몇몇 교회에까지 번지고 있다. 우리가 굳이 폭로하는 결단보다 침묵하며 개혁하는 용기를 선택할 수는 없단 말인가.

이 시대 가장 무서운 적은 바벨탑의 욕망이다. 욕망을 제거하고 그 바벨탑을 버릴 때 희망이 있다. 자기감정과 기득권 보다는 공공의 목적,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아무리 오늘날의 교회와 교계를 바로 잡는다 하더라도 그 내면의 동기가 개인의 내적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 시대 공익을 해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그리고 교단이나 교계는 어떤 모습인가. 바벨탑을 무너뜨릴 용기가 없다면, 조금은 비굴하고 신앙적 자존심이 구겨지더라도 중세 수도원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이라도 배울 용기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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