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

[함성호의 옛집 읽기]<12>‘균제미 속 자유’ 관가정

꿈 꾸는 소년 2012. 2. 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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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6(목) 03: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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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의 옛집 읽기]<12>‘균제미 속 자유’ 관가정

동아일보DB

문학이 언어를 떠나서 문학으로 있을 수 있을까. 음악이 음을 떠나서 음악일 수 있을까. 언어는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자유이자 한계다. 음은 음악을 음악이게 하는 자유이자 한계다. 관가정의 계자난가를 만지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관가정은 우재 손중돈의 살림집이자 지금은 서백당으로 옮겼지만 월성 손씨의 종가였다. 이름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이다. 집에서 보면 과연 그렇다. 물봉에서 호명산을 바라보게끔 지어진 집은 그 오른쪽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안강 들판이 그대로 보인다. 복잡한 여느 동네 반가의 형이상학적 이름과는 사뭇 다르게 간단하다.

집의 평면도 꼴로 보면 딱 맞게 좌우 대칭이다. 안채에 세 칸의 넓은 대청이 있고, 안방과 사랑채 사이에 또 마루가 있으며, 사랑채에서 안강 들판 쪽으로 넓은 마루가 또 있다. 이 마루는 현재 한 칸은 안방용 마루고, 한 칸은 광으로 사용된다. 마루가 이렇게 많은 것은 대종가로서 잦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손중돈은 차남이었지만 당시의 관례대로 큰형이 장가들어 마을을 떠남으로써 종손이 되었다. 그는 문묘에 배향될 정도로 학문이 깊었고, 평생 벼슬살이를 했다. 그의 몸에 밴 관료 의식은 유가의 이념과 맞물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예(禮)에 천착하게 했다. 관가정의 반듯한 대칭성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관가정은 이 대칭성을 파괴하지 않고 전혀 대칭성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함을 이루었다. 반듯한 균제미 속에서 자유를 구가한 것이다. 바로 잦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구성한 마루에 의해서다. 마루는 방과 달리 벽이 없다. 마루의 이 개방성이 외부 공간과 조우하면서 관가정의 균제미는 그 대칭성을 파괴하지 않고도 공간 속에서 자유를 구가한다.

그 절정이 안강들이 내려다보이는 사랑채의 대청이다. 원래 이 집에는 담장과 대문이 없었다. 가랍집(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초가집)들이 접근로에 있어서 드나드는 사람들의 통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집의 영역은 그대로 물봉에서 호명산으로 이어지고, 안강들로 확장된다. 2차원의 평면 속에서는 대칭 속에 갇혀 있던 집이 3차원의 공간에서는 마음가는 대로 풀려나오는 집. 그 한계 속에서 자유롭기에 자유의 한계를 훌훌 털어버린 집이 관가정이다. 조선집의 참매력이 아닐 수 없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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