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

[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45>디지털과 여성

꿈 꾸는 소년 2012. 6. 3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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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6.21(목) 03: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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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45>디지털과 여성

에로스와 지성은 같이 가야 한다. 그리스 신화 중 에로스와 프시케. 동아일보DB

남성은 서열과 위계에 민첩하고, 여성은 공감과 유대에 민감하다. 전자는 잘 짜인 조직에 적합하고, 후자는 유연한 네트워크에 잘 맞는다. 전자는 수량과 사이즈에 열광하고, 후자는 질과 밀도를 중시한다. 디지털 문명이 여성성과 ‘궁합이 더 잘 맞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디지털은 유동한다. 성별, 인종, 세대, 계층 등을 가로질러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거기’로 종횡한다. 이 흐름을 하나의 고정된 프레임에 가두는 건 불가능하다. 인식론적 포인트가 ‘정착에서 유목으로’ 옮겨간 것도 그런 맥락이다. 유목민에게 필요한 건 접속과 변용이다. 어디든 갈 수 있고, 그 무엇과도 통할 수 있는. 하여 언제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능력. 디지털과 유목민, 그리고 여성성이 조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런 시대적 조건이 여성에게 반드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여성은 ‘음(陰)’의 기운을 주로 쓴다. 물이 그러하듯, 음기는 스며드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동시에 집착과 저장의 욕망도 강렬하다. 그럴 경우 공감과 소통은커녕 정반대로 외부적 흐름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더 많이, 더 오래. 이런 장벽을 뚫고 나오려면 양(陽)의 기운, 곧 남성성이 필요하다. 남성성은 삼투성은 약하지만 한계를 돌파하는 면에서는 훨씬 역동적이다. 양기가 지닌 결단력과 과감함 덕분이다. 그런데 이 결단과 용기의 저력은 다름 아닌 지성이다. 지성이란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적 배치, 그리고 존재의 좌표를 읽어내는 명철함이다. 어둠을 밝히는 건 불이다. 불이 곧 양기다. 남성성이 지적 탐구에 더 장기를 발휘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음과 양은 서로 맞물려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 안에 여성이, 여성 안에 남성이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두 항목은 서로 대립해 왔다. 그래서 생겨난 오해 중 하나가 바로 지성과 에로스의 양극화다. 지성을 탐구하면 에로스적 능력을 잃어버리고, 에로스적 열정을 누리려면 지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몹시 폭력적인 이분법. 대학이 특히 그렇다. 우리 시대 대학에는 지성이 없다. 지적으로 무능하다는 게 아니라 지적 열정이 전혀 주도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하여 지(知)와 사랑, 미(美)와 윤리, 냉정과 열정, 이 모든 것이 이항대립으로 존재한다. 마치 이 양극단 사이에서 하나를 비장하게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파편적으로 작동하는 삶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이 유동하는 디지털 시대에.

18세기에 특이한 문인이 한 명 있었다. 이옥(李鈺)이라는 이다. 이름도 여성적이지만 그의 문체는 그야말로 ‘트랜스젠더적’이다. 그는 여성보다 더 여성의 정감을 잘 드러낸 남성 작가였다. 이 때문에 정조가 일으킨 문체반정의 희생자가 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누군가 물었다. 왜 그렇게 ‘정(情)’을 탐구하느냐고? 그가 답했다. “천지만물을 관찰하는 데 있어 사람만큼 큰 것은 없고, 사람을 관찰하는 데 있어 정만큼 묘한 것은 없으며, 정을 관찰하는 데 있어 ‘남녀의 정’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이언(俚諺)’) 관찰이 곧 지성이다. 이처럼 지성과 에로스는 본디 함께 간다. 디지털과 여성성의 행복한 마주침 역시 그 위에서만 가능하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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