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6>건강과 지혜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 하나. 저것이 일상이라면 몸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거짓말과 음모는 단지 윤리적 사항이 아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일이다. 당연히 뇌파도 교란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소위 ‘운명적 사랑’을 하려면 ‘정기신(精氣神)’이 엄청 소모될뿐더러 무의식에까지 스트레스가 쌓이게 된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대개 불치병에 걸린다. 그래서 더더욱 비련의 주인공이 되지만 사실 그건 자업자득에 불과하다. 그런 식의 동선과 관계 자체가 이미 질병인 까닭이다.
질병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야 하듯 건강에 대한 시각 또한 달라져야 한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단지 병에 걸리지 않고 각종 수치가 정상이면 건강한 것인가? 어떤 삶을 살든 간에? 절대 그렇지 않다. 삶이 왜곡되면 생리적 리듬도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지순한 사랑의 파토스도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 병이 된다. 그리고 이 병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질병보다 더 치명적이다. 존재 자체를 심하게 훼손할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삶에 대한 지혜와 분리될 수 없다.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병을 ‘지혜의 결핍’으로 정의하고 있다.
‘동의보감’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양생술은 유불도의 수행과 분리할 수 없다. 수행의 핵심은 비움이다. 무지와 탐착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생술이란 무지로부터의 자유, 곧 내 안에 있는 지혜를 일깨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혜의 핵심은 소통이다. “선은 맑고 가벼운 데서 나오고 악은 무겁고 탁한 데서 생기네. 선은 투명한 데서 나고 악은 막힌 데서 생기네. 사람이 기혈이 진정된 때에는 정신이 통명하고, 또 기혈이 흐린 때에는 정신이 어둡고 미혹되네.”(한규성 ‘역학원리강화’)
양생의 대원칙인 ‘통즉불통(通則不痛·통하면 아프지 않다)’ 역시 같은 이치의 소산이다. 요컨대 건강이란 근원적으로 몸과 외부 사이의 ‘활발발(活潑潑)’한 소통을 의미한다. 소통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병이다. 그래서 몸에 대한 탐구는 당연히 이웃과 사회, 혹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탐구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여, 의학과 역학은 하나다. 그래서 의역학(醫易學)이다. 의역학이 21세기적 비전과 마주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물론 이 오래된 지혜는 ‘지금, 여기’에 맞게 변주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과의 접속이 절실하다. 인문학은 우리 시대를 구성하는 지성과 표상의 배치다. 의역학이 생생한 비전이 되려면 반드시 이 프리즘을 통과해야만 한다. 고전의 원대한 비전과 인문학의 현장성을 대각선으로 잇는 앎, 그것이 곧 ‘인문의역학’의 세계다. 이 매트릭스 위에선 모두가 ‘자기 몸의 탐구자’가 된다. 아는 만큼 자유롭고, 아는 만큼 살아낸다. 고로, 앎과 자유, 건강과 지혜는 하나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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