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노후에 뭘할지 막막”… 재산 100점 기업인도 총점은 65점
은퇴 후 부인 김경희 씨와 함께 배드민턴을 즐기며 안정적인 노후생활을 보내는 문인선 소장(오른쪽). 소령으로 예편한 뒤 현재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는 그는 “재취업과 여가활동을 미리 준비하면 은퇴 후 삶이 풍족해진다”고 조언했다. 원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사회적 지위가 높고 보유한 자산이 많다고 해서 은퇴 후 준비를 마쳤다고 평가한다면 뜻하지 않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은퇴한 뒤 무엇을 할 것인가, 노후의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유전불행(有錢不幸)’의 노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아일보가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와 서울대 노년·은퇴설계지원센터에 의뢰해 두 기관이 보유한 25∼75세 일반 국민 2000명의 데이터베이스(DB)를 활용해 정량(定量)적 요소인 재무준비지수 외에 정성(定性)적 요소인 은퇴 후 할 일과 여가, 가족관계 등을 분석해서 내놓은 결과이다.
삼성생명과 서울대는 상반기(1∼6월)에 이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및 면접조사를 거쳐 7월 ‘한국인의 은퇴준비 2012’ 보고서를 발간했고 동아일보는 이번에 관련 DB를 토대로 추가 분석을 했다.
○ 부사장·차관 vs 관리소장
동아일보는 추가 분석에서 각각 성공한 기업가와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는 류필계 LG유플러스 대외협력전략실장 부사장(56)과 이상길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54)을 대표 사례로 은퇴준비지수를 산출했다. 그 결과 류 부사장의 재무준비지수는 100점, 이 차관은 82.5점으로 두 사람 모두 최고 수준에 해당했다. 자산은 이상길 차관이 11억 원(공직자 재산신고 기준)이고 류 부사장은 이보다 더 많다.
하지만 류 부사장의 은퇴 종합준비지수는 65.4점, 이 차관은 64.5점으로 평균치인 58.3점과 큰 차가 나지 않았다. 이는 두 사람이 은퇴 뒤 할 일과 여가, 가족관계, 심리 등의 항목에서 재무 항목의 점수를 축냈기 때문이다. 특히 베이비부머(1955∼63년생)층에서 은퇴 후 경제력은 좋지만 삶의 질을 높이려는 준비는 미흡한 이가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류 부사장은 은퇴 뒤 무엇을 할지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일준비지수는 46.0으로 평균 51.1점보다 낮았다.
이 차관은 여가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여가준비지수는 44.0점으로 평균 56.1점보다 낮았다. 이 차관은 한 달에 한두 차례 주말에 등산을 다니고 가끔 퇴근 후 집 근처 산책로를 부인과 함께 걸을 뿐이다.
반면에 문인선 씨(55)는 강원 원주시의 한 아파트 관리소장이다. 그의 자산은 1억5000만 원짜리 아파트 한 채와 두 아들을 위해 마련한 소형 아파트 2채(총 1억6000만 원), 저축 조금이 전부다. 노후를 위해 온전히 쓸 수 있는 돈은 약 2억 원 안팎으로 이번 분석 대상자 평균인 2억 원 이상 3억 원 미만보다 조금 적다.
하지만 문 소장은 지금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다. 그는 1998년 소령으로 예편한 뒤 9년간 택시를 몰았지만 똑같은 일상이 지겨워 관리소장을 하기로 했다. 50세 때 주택관리소장이 되기 위한 시험을 준비해 5개월 만에 합격했다.
그는 바로 이 시점에 부인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앞으로 이어질 인생에서 가족과의 관계를 다져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이전에는 테니스를 즐겼지만 부인과 함께할 운동을 궁리하다 배드민턴을 선택했다. 여가 선용과 가족관계 개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는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아내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배드민턴 대회를 찾아 참석한다”며 “얼마 전에는 강원 횡성 한우배 배드민턴 대회를 다녀오면서 주변 지역을 여행하고 먹거리까지 경험하고 오니 일석이조”라고 자랑했다.
○ “바빠서 준비할 시간 없어”
류 부사장과 이 차관은 ‘일(류 부사장), 여가(이 차관) 준비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자 이구동성으로 “미처 시간이 없었다”고 항변했다.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후 일거리 준비가 미흡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은퇴할 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관계자는 “대부분의 은퇴자는 은퇴 시점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은퇴를 맞는다”며 “계획보다 빨리 맞이한 은퇴 때문에 준비가 미흡하게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여가나 취미 준비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 제대로 못하고 있다. 한주형 FMI연구소장은 “은퇴 후 우울해하는 베이비부머들에게 ‘본인이 즐거운 일을 하라’고 조언하면 ‘뭘 하면 좋을까’라고 되묻는 사람이 많다”며 “‘회사형 인간’으로 살다 보니 여가를 즐길 수도, 생각할 시간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재무준비가 평균 이하라도 은퇴 준비종합지수가 상위 30%인 사람’ 94명을 분석한 결과 일과 주거, 건강 심리 등 4개 항목의 준비지수가 평균보다 13점 이상 높았다.
이들의 총자산 수준은 2억 원 미만이 대부분으로 분석 대상자 평균보다 낮았지만 집값과 생활비가 서울보다 싼 부산 광주 대전 등 지방에 살며 자가 주택을 갖고 있어 주거 안정성을 확보했다. 또 정규직 근로자보다 고용주나 단독 자영업자가 많아 일거리도 갖췄다. 건강은 ‘좋다’(매우 좋다 포함)고 말한 대상자도 85%로 평균 54.2%를 훌쩍 넘었다. 고혜진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재산 대신 다른 요소들을 대체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어 행복하고 활기찬 노후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류 부사장과 이 차관은 자칫 은퇴 후 상대적 상실감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다는 예상도 나왔다. 김어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성공한 베이비부머일수록 은퇴 후 ‘나는 왜 사는지 모르겠고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내 역할이 사라지고 친구도 없다’고 우울해하기 쉽다”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주말에 돈을 쓰며 여행을 가는 게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생각으로 여가, 취미를 키워가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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