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기 목사

[방선기 목사의 생활신앙(32)] 몸에 대해서

꿈 꾸는 소년 2013. 9. 9. 08:08

[방선기 목사의 생활신앙(32)] 몸에 대해서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합 대표)
2010년 11월 29일 (월) 09:29:00 기독신문 ekd@kidok.com

 
몸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자

하나님 귀한 선물을 쾌락 좇는 도구로 삼지 말아야


   
  ▲ 방선기 목사  
경건한 크리스천들은 “영적”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영적 성장, 영적 분위기, 영적 전투 등이다. 그러다보니 “육적”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부정적으로 느낀다. 대체로 영적인 것은 사람의 영혼과 관련된 것이며 육적인 것은 육신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경건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성경적인 생각은 아니다.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기독교적인 것처럼 오해되어 왔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는 구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오해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영과 육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영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하며 육적이란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하면 육신에 속한 것도 영적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영혼과 관련된 것도 육적이다.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주신 것이다. 바울은 당시 종교인들이 육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다 선하다면서(딤전 4:4) 육신의 가치를 강조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요 1:14) 요한은 그 사실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다(요일 4:2-3). 우리가 나중에 부활할 때도 바로 그 육신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고전 15:53). 이렇듯 우리의 육신에는 영적 가치가 있다.

육신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를 하면 육신을 잘 관리해야 할 청지기 사명을 무시하는 것이 죄악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몸에 대한 관리의 책임을 넘어서 몸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더구나 몸 자체의 가치를 절대시하면 육신의 문제가 육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변질시킨 타락된 인간의 현실이다.

이런 문제는 육신의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몸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은 육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을 생각해 보라. 아름다움은 창조의 본래 모습이다. 전도서 기자는 의복을 깨끗하게 하며 머리에 향 기름을 바르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생각했다(전 9:8).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죄의 유혹이 될 수 있으며 그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할 때 죄악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대 사회는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풍조가 문제이다. 아름다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아름다움 지상주의는 허영과 물질주의, 사치를 낳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몸을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도 육적이지 않다.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가꾸는 것은 가장 사람다워지는 행위이며 건강에도 큰 유익이 된다. 종종 제대로 씻지 않았거나 체취가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견디기 힘든 상황을 생각해보라. 몸을 깨끗이 관리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예의이고 영적인 일일 수 있다.

사람들은 몸의 건강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요한은 영혼이 잘 됨 같이 몸이 건강하기를 기원했다(요삼 1:2). 육체의 건강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운동도 하고(딤전 4:7) 음식도 조절해야 한다(딤전 5:23). 제대로 몸을 관리하지 못해 질병에 걸리는 것을 죄악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죄송한 일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육체의 연약함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육체의 약함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자신의 약함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안 뒤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후 12:9). 오늘 우리도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으나 자신의 질병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균형 잡힌 영성이 필요하다. 건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태도는 청지기의 직분을 넘어선 모습이다.

고대로부터 육체의 쾌락과 고통의 대한 견해는 종교 별로 다양해왔다. 아무래도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육체적 고통을 신앙의 표현으로 생각해왔다. 예수님의 고난을 따르는 것이 제자들의 자세라고 생각했고(눅 9:23)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했다(골 1:24). 베드로 역시 성도들이 당하는 육체의 고난에 영적 유익이 있음을 누누이 강조했다(벧전 4:1).

그러나 이것을 육체를 부정하거나 학대하는 금욕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무래도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쾌락이다. 현대 사회의 발전 과정을 보면 몸이 더욱 편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선물인 쾌락을 넘어서서 죄악으로 치닫게 된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귀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그렇듯이 우리 몸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는 그것을 부추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우상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바울의 고백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