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분단의 아픔속 뿌리내려… 대륙 진출의 든든한 자산
조선족은 중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주민족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18일 지린 성 옌볜 조선족자치주를 처음 방문해 한복을 입은 조선족 주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옌볜=신화 뉴시스
이주동포 후손 중국 베이징의 한인 밀집지역 왕징에서 김치 가게를 운영하는 조선족 이영진 씨.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건너왔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13억 인구에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에서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을 맞아 특정 민족의 역사를 관영방송으로 집중 조명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중국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초 CCTV는 회당 20분씩으로 줄여 5부작으로 방송하려다가 조선족 이주사를 온전히 보여주겠다는 취지로 막판에 다시 내용을 늘리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중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조선족은 19세기 중반 한반도의 자연재난과 가난, 일제강점기 시절의 억압 통치와 독립운동, 전쟁과 분단 등의 역사를 거치면서 중국 땅에 정착한 한(韓)민족과 자손들이다. 베이징(北京) 차오양(朝陽) 구의 한인 밀집지역 왕징(望京)에서 김치 가게를 운영하는 이영진 씨(56)도 그중 한 명이다.
강원도 양양이 고향인 그의 부친은 1930년대 말 일본 경찰과 다툰 뒤 지린(吉林) 성으로 건너왔다. 광복과 분단 과정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 중국에 눌러앉았다. 양양에도 부인과 자녀가 있었으나 중국에서 다시 가정을 꾸려 이 씨 등 4남 4녀를 두었다.
조선족 연구 최고 권위자인 황유복 중국 중앙민족대 교수에 따르면 조선족 이주사는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맨 처음에는 1800년대 중반 한반도의 자연재해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만주 등으로 들어간 ‘자유 이민’에서 시작됐고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본격화된 독립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망명 이민’으로 변했으며 일제가 토지개혁 등으로 땅을 잃은 사람들을 만주 등으로 이주하게 해서 나타난 ‘관리 이민’으로 이어졌다.
이 씨 가족처럼 광복과 분단 과정에서 조선족이 된 사람도 적지 않다. 황 교수는 “1945년 8월 만주의 조선인은 200만 명 이상이었으나 1953년에는 113만 명으로 줄었다”며 “100만 명 이상이 한반도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광복 전까지 만주 등 주로 동북 3성에 살았던 한반도 출신의 주민 중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중국 국적을 가진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족이 됐다.
2013년 한국 외교부 통계에 따르면 중국 내 조선족은 222만여 명에 이른다.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인구 규모로 13번째로 크다. 조선족은 중국 내 소수민족 인구 수에서는 10위권 밖이지만 교육열은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인구통계에 따르면 한(漢)족을 포함한 56개 민족 중 15세 이상 인구의 평균 문맹률이 2.8%로 1.8%인 타타르족에 이어 두 번째로 낮다.
조선족은 지린 성 내에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와 창바이(長白) 조선족 자치현 등 두 개 민족자치구역을 갖고 있다. 이들은 옌볜 조선족 자치주 등 동북 지역 각지의 조선족 거주지에 모여 살면서 높은 민족적 자부심과 민족의식을 갖고 한국어와 한글, 한국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면서 민족공동체를 유지해왔다.
조선족은 1978년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 채택 이후 연해(沿海)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산업화와 현대화 추세를 따라가기 위해 동북 지역의 전통적인 거주지와 과거 농업 중심의 생산활동 영역을 벗어나 중국 전역 및 한국, 제3국으로 진출하면서 분화하고 있다. 이같이 분화하는 다양한 조선족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이에 맞춰 융화하고 협력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민족적 자산으로 키우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조선족 동포’들은 대륙을 여는 큰 자산이자 우군(友軍)이었다. 수교 20여 년 만에 중국이 한국의 제1교역국으로 부상하는 데는 조선족 동포들의 역할이 컸다.
중국이 일본을 누르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되고 자동자 가전 휴대전화 등의 세계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면서 중국 내수시장을 개척하는 데 있어 조선족 동포들과의 협력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의 역할도 과거처럼 통역과 가이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업 협력 파트너로도 격상되고 있다.
중국 각 지역에는 조선족 기업인들이 주축인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지회가 23곳이 있다. 또 지방정부별로 조선족기업가협회 소속 지회도 있다. 지난달 24∼26일 베이징에서는 베이징 칭다오(靑島) 등 화북지역 5개 옥타 지회 공동으로 ‘차세대 통합 무역스쿨’ 행사가 열렸다. 차세대 기업인 꿈나무를 양성하기 위한 이번 행사에 조선족 ‘새내기 사회인’ 100여 명이 참가했다.
김길송 월드옥타 베이징 지회장은 “조선족 기업인들은 중국인과 중국 시장에 익숙하다”며 “성공한 자영업자나 기업인도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지회장은 또 “한국 기업이 처음 중국에 진출할 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당한 사업 파트너로서 동포 기업인을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한국에는 아직 미국 등 다른 지역의 동포와 조선족 동포를 차별하는 의식이 깊게 남아 있는 것 같다”며 “이는 조선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전략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조선족들의 ‘코리안 드림’… 초기엔 3D업종 집중 전문직 진출 크게 늘어 ▼
조직범죄 연루 등 사회문제도
한국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현재 한국 내 장기 체류(90일 이상 체류 가능 비자 소유자) 조선족은 61만6109명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국적 회복자’는 10만1000여 명이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부동산 중개소 5곳을 운영하는 조선족 K 사장(35)은 “20대 조선족 직원 3명이 최근 몇 달 새 한꺼번에 한국으로 가버려 애를 먹고 있다. 마땅한 일자리도 찾지 못했으면서 그냥 건너가 버렸다”고 한다. 한국 내 90일 이상 장기 체류 조선족 동포는 불과 1년여 만에 10만 명 이상이 늘었다. 무작정 한국행을 선택하는 조선족 젊은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고 한국이 조선족을 포함한 재외동포에 대한 비자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족 동포와 한국 사회의 교류는 크게 늘었다. 베이징총영사관의 김도균 영사는 “조선족에 대한 비자 개방은 98% 수준”이라고 말했다. ‘2% 부족’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다른 재외동포와 달리 조선족 동포에게만 단순 노무직 등에 대한 일부 취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영사는 “가까이 살고 수가 많은 조선족 동포에게 노무직까지 개방하면 국내 노동시장에 혼란이 초래되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포용의 길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은 초기에 ‘식당 아줌마’와 ‘근로자’ 등으로 3D 업종 종사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대학교수 변호사 연구원 등으로 스펙트럼이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의 조선족 12명의 경험담을 모은 ‘조선족 3세들의 서울이야기’(2011년)에 따르면 만주 등으로 건너간 조선족이 1세대, 한국에 건너와 3D 업종을 마다하지 않는 조선족이 2세대, 한국에서 전문직에 진출하는 조선족이 3세대에 해당한다.
한국에서 성공하는 조선족이 늘고 있는 반면 범죄 등에 연루돼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조선족 출신인 박우 한성대 조교수는 “조선족이 사회적으로 잘 융화되며 한중을 잇는 또 다른 가교가 되도록 만드는 일은 한국이 풀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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