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나마 통일조국 보는게 마지막 소원”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은 한국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징용해 갔어요. 강원 홍천에 살던 나는 징용을 피해 마을 뒷산으로 도망가 은신처에 숨어 살았습니다. 가끔 먹을 것을 전해주는 이들을 통해 독립군과 연합군의 승전 소식을 들으며 광복의 날만을 기다렸죠.”
광복의 기쁨도 잠시.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전장에 나갔다. 영어를 잘했던 덕분에 24사단 포병 무전병으로 일하게 되면서 미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유엔군을 따라 한탄강을 건너서 북진하던 중 인민군이 쏜 총탄이 내 철모를 맞고 튀어 나갔어요. 그때 죽을 뻔했죠. 천마산 전투에서는 양측이 너무 많이 죽어 중공군 시체를 베고 잠을 잘 정도였어요.”
이 씨는 정일권 장군이 한국군 2군단을 창설하자 국군에 들어갔고, 정 장군이 미국 대사로 자리를 옮긴 뒤인 1960년 그의 권유를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조지타운대 외교학과에서 공부하게 됐다.
“전쟁 통에 미군에서 일하며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조국 발전에 기여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살다 보니 참 살 만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미국에 남아 조국을 위해 할 일을 찾자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 씨는 백인들을 상대로 가발 소매업을 하며 재산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돈을 미주한인 조직 발전에 바쳤다. 1978년 1월 그는 미주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22개 한인회를 모아 미주총련을 만들었다.
“미국으로 건너오는 한국인들은 크게 늘었지만 미국 내 다른 소수민족 그룹에 비해 영향력은 크지 못했습니다. 영향력을 키우려면 각 지역 한인회들을 잇는 통합 조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미주총련을 만들었습니다.”
지난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발음이 다소 어눌해진 이 씨는 2일 기자에게 “몸은 미국에 있지만 부모님의 나라 대한민국을 잊지 않았다”며 “둘로 쪼개진 남북한이 통일이 되는 것을 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공동기획: 동아일보·재외동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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