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부친 戰死기록 1997년에야 찾아… 유골이라도 모셔와야 恨 풀릴 것”

꿈 꾸는 소년 2015. 8. 12.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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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2 03:00: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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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戰死기록 1997년에야 찾아… 유골이라도 모셔와야 恨 풀릴 것”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돼 팔라우 섬에서 사망한 아버지(왼쪽 초상화)의 유골을 기다리는 이명구 씨. 그는 6일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일제가 아버지를 끌고 가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설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1월 어느 날 경기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아버지 이낙호 씨(1914년생)와 함께 있던 당시 일곱 살 이명구 씨(78) 집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그는 10리(4km) 밖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무작정 뛰었다.

아버지는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한동안 숨어 다니다 지친 끝에 할머니에게 “어쩔 수 없이 다녀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명구 씨는 ‘아버지를 못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할머니와 왔지만 아버지는 이미 끌려가고 없었다.

“그렇게 생이별을 했습니다. 아들을 일본에 빼앗겼다고 울부짖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끌려간 아버지로부터는 편지 한 통 없었다. 가장이 없는 집안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듬해 8월 광복을 맞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1946년 어느 가을날 새벽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병으로 돌아가셨다.

“다섯 살 터울 남동생마저 얼마 뒤 굶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울던 동생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 씨는 “아버지가 일본에 강제로 징용된 뒤 4년 사이에 가족을 모두 잃었다”며 “일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연탄공장 노동자와 학교 등사실 직원 등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살았고, 1997년에야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일제가 만든 서류에는 ‘마츠모토 라쿠시노기(松本落鎬·아버지의 일본 이름). 육군 군속. 제3선박운송사령부 소속. 쇼와(昭和) 20년(1945년) 4월 12일 남양 군도(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일대) 팔라우에서 전병사(戰病死)’라고만 적혀 있었다.

남양 군도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수천 명은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 등에 동원돼 혹사당했고, 총알받이로 내몰리며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폭격과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 씨는 지금도 아버지의 사망일이 아니라 아버지가 집에서 끌려가던 날 추도 예배를 올린다. 일본이 만든 서류의 사망일자와 사망원인을 믿을 수 없어서다. 그는 부친의 위패를 충남 천안시 망향동산에 모셨지만 일본 야스쿠니신사에도 위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한국인 야스쿠니 합사 취소 소송에도 참여하고 있다.

“없는 소작 살림에도 친구들은 못 가진 연필하고 크레용을 사다 주시던 아버지셨어요. 유골이라도 한번 만져 봤으면 이 한이 조금이나마 덜어질까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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