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

장로 기도회 준비

꿈 꾸는 소년 2016. 3. 24. 05:09

 기독교 진리에는 몇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① 죽어야 한다는 것. ② 낮아져야 높아지는 것. ③ 약할 때 강해지는 것.

 인간은 지고지순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이면서 동시에 가장 나약한 존재. 셰익스피어(영국 작가)

 '미움받을 용기'가 지난해(2016년) 내내 베스트셀러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만큼 팍팍한 우리 사회에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힘들고 지친 사라들,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운 사람들이 많을수록 아음을 다잡아 주는 종교의 역할이 크다.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종교인들의 조언을 들어본다. - 위로와 용기를 전하는 종교인 릴레이 인터뷰 <1> 이준성 약현성당 주임신부.  

- 무관심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가장 큰 적으로 꼽았다. 무관심이 서로 간에 벽을 쌓게 하고 불신을 낳아 결국 적대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관심해지는 것은 "관심을 가지면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신부의 진단이다.

 요 11:40 또 주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에 함께 동참하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에 同參하여 울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동정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울고 조문객들이 울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비판하고 정죄하는 말만 했습니다.(36~37절)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긍휼히 여기느 마음,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오늘 슬픔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함께 동참하여 같이 울어준 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부활의 아침에 부활의 생명을 가진 저와 여러분들이 이 주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인격적인 만남. 지정의의 하나님. 여려울 수록 기본과 원칙과 원리로 돌아가야 선거를 통해서 막장 드라마 코메디 기독당.

지도자들의 오만과 독선 도그마에 빠진 현실 괴리감을 본다.

 현실에서 답이 필요한 문제들 그러나 정작물을 곳도 없고, 막상 교회에 가서 물으려 해도 '눈치가 보여' 차마 던질 수 없는 질문들을 이야기 한다. 김형석 노학자 97세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 비참함을 아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믿음의 선조라고 불리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도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였을까요? 아니다. 그들고 우리와 똑같이 부족한 면들을 가진 인간 중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회개와 축복의 과정을 통해 믿음의 선조로 남게 되었다. 종교는 인간을 가장 비참한 위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환희에 찬 위상까지 알려주고 체험하게 만든다. 죄인에서 성자가 되는 과정이 곧 신앙이란 의미다. 따져보면 우리도 그 세 사람 중 하나다. 그런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과거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과 삶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물론 뉘우침이 큰 사람은 축복도 커지며 새 출발이 특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수도 있다.(본문 131페이지)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 가슴 깊은 신념에서 말하는 `아니오`는 그저 다른 이를 기쁘게 하거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말하는 `예` 보다 더 낫고 위대하다.  <마하트마 간디>

 

“한 명의 천재보다 보통의 사람들이 똘똘 뭉쳐 내는 성과가 크다.” - 범재 경영론 동원 그룹 세미나.

무너진 우물 안 개구리(井底之蛙,정저지와)가 근처를 지나가던 바다 거북이에게 우물 안 삶의 행복론을 자랑스럽게 펼칩니다.

 

"나는 참 즐겁소. 나는 우물가 위로 뛰어 올라 놀기도 하고, 우물 안에 깨어진 벽 틈으로 들어가 쉬기도 하오,

물로 들어가서는 양편 겨드랑이를 수면에 대고 턱을 물에 받치며, 진흙을 발로 차면 발은 발등까지밖에는 그 속에 빠지지 않소,

 

장구벌레나 게나 올챙이를 둘러보아도 나와 같은 자가 없소, 거기다가 한 우물을 독점하고서 무너진 우물을 지배하는 즐거움이란 또한 최고의 것이오. 당신도 때때로 들어와 보는 게 어떻겠소?"

 

개구리의 자랑에 거북이가 우물에 들어가려고 왼발을 넣기도 전에 오른편 무릎이 걸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정어정 물러나와 개구리에게 바다 얘길 합니다.

 

"천 리의 먼 거리로도 바다의 크기를 표현하기엔 불충분하고, 천 길의 높이로도 바다의 깊이를 형용하기엔 부족하오. 바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법이 없으며, 물을 더 보태도 덜어내고 하는  데 따라 늘고 줄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동해의 큰 즐거움인 것이오"

 

무너진 우물 안 개구리는 그 얘기를 듣고 나자 소스라치게 놀라서 멍하니 스스로를 잃었습니다. 

 

<장자> 외편, 16편(선정) 12에 나오는 우화였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의 행복의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하지만 또다른 행복한 세계가 어딘가엔 있지 않을까요? <장자>에는 번득이는 통찰이 담긴 우화가 가득합니다. <장자>에서 새로운 삶의 지혜를 얻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이사장 박경귀)가 Happy Classic 제18회 고전아카데미를 개최합니다. 시민 여러분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고전에 담긴 지혜를 듣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특별한 준비를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오셔서 듣으시면 됩니다. 고전은 혼자 읽기 힘듭니다. 먼저 듣고 생각하는 것도 효과적인 간접 독서입니다. 강의자료를 나누어 드립니다. 강의를 듣고 고전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보심은 어떨지요?

 셋째, 정복하며 다스리는 자로 사는 것.

 

 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창1:28절b) 그러면 땅을 정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확장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스리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죽음도 다스리고 질병도 다스리고 풍랑도 다스리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피조세계도 다스려야 합니다. 피조세계를 다스린다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도 다스려야 합니다. 물질을 다스리지 못하면 탐욕이 나를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돈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돈 때문에 신앙의 양심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거둡난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정복하며 다스리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 

 

독일 커뮤니케이션 학자 엘리자베트 노엘레노이만

- 사람들은 자기 의견이 지배적인 것으로 인식될 때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현하지만 소수의 것으로 몰릴 때에는 고립을 두려워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침묵으로 들어간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독일어) :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감정. - 미국 켄터키대 리처드 H 스미스 교수(심리학)/'쌤통의 심리학' . 현암사) /쌤통 : 남이 낭패 본 것을 고소해하는 뜻.

마녀사냥. 인민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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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3:00: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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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이 한줄]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 도전받는 ‘표현의 자유’

아무리 그 의견이 비도덕적이고 불경스럽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절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전제하는 태도가 비판을 덜 받거나 덜 위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엇보다도 더 치명적인 해독을 끼치게 된다.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책세상·2005년)

상사들은 “무슨 의견이든 자유롭게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아랫사람이 자기주장을 또박또박 펼치면 눈살을 찌푸린다. 젊은 직원들은 “윗사람이 꽉 막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상사의 지적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불편해한다. 반대 측 의견은 표출조차 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세상의 모든 논쟁이 ‘옳고 그름’ 또는 ‘정의와 불의’ 사이의 대결이라면 얼마나 인생이 쉽고 간단해질까.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기보다는 각각 어느 정도씩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인간의 정신적인 복리를 위해 ‘다른 의견을 가질 자유’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침묵을 강요당하는 모든 의견은 진리일 가능성이 있는 데다 틀렸더라도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설령 통설이 전적으로 옳다고 해도 이설을 통해 진지하게 시험을 받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 근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의미가 퇴색되고, 결국 사람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인간사회는 ‘다른 의견’이 없다면 퇴보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인간이 토론과 경험에 힘입어 과오를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잘못된 생각과 관행은 사실과 논쟁 앞에서 점차 그 힘을 잃게 된다고 얘기한다. 그렇기에 어떤 생각을 억압하는 것은 ‘강도질 같은 악’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억압한 의견이 옳다면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잘못됐다면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빼앗은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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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유意志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자유의지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여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만일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데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두 가지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로 선악과를 먹는 책임을 하나님이 지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선악과를 먹었기에 그 책임 역시 아담이 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아담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로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인공지능이 뛰어난 로봇이라 할지라도 로봇은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과는 인격적인 사랑과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자라야 인격적인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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