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내 마음속 블랙리스트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의대 교수
‘블랙리스트’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니 ‘요주의 인물 명부’입니다. 요주의 인물이란 피하거나 불이익을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내 편에서 배제해야 할 사람입니다.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국가 권력을 휘둘러 이렇게 한다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아주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정말 흥미롭게 돌아갑니다. 이른바 대권 후보들의 입에서 엄청난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대청소를 해야 한다” “대한민국 혁명하라”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 “서울대학교를 폐지해야 한다” 등등.
국회의원도 거들고 나섭니다. “모든 공직에 65세 정년을 도입하자.”
이렇게 쏟아내는 말들을 들어 보니, 이 말 저 말 모두 “내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은 모두 확실하게 솎아내자!”로 들립니다. 농경민족의 후예여서일까요. 벼농사가 잘되려면 잡초를 철저하게 뽑아내야 한다는? 나라를 위하는 충정에서 나왔으리라 의도를 짐작해 보지만 확신은 없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아기가 태어나서 엄마를 나쁜 엄마와 좋은 엄마로 나누어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배고플 때 젖을 금방 물리는 엄마는 좋은 엄마이지만, 늦게 물리거나 울어도 무시하는 엄마는 나쁜 엄마입니다. 그러다 경험이 쌓이면 두 엄마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엄마 안에 나쁜 면과 좋은 면이 같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을 통합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됩니다. 통합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음은 성숙하고 균형 잡힌 인격의 소유자라는 증거입니다.
꼭 문서로 만들어야 블랙리스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정략적인 이유로 대한민국 국민을 내 편, 남의 편으로 분리해 대립시키고 갈등을 증폭해 이익을 취하려 한다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내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더군다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면 적용 규모나 국가에 끼칠 부작용에 있어서 훨씬 더 악의적입니다. ‘대청소’ ‘혁명’ ‘해체’ ‘폐지’ 모두 대상이 있어야 되는 행위입니다. 대상을 선정하려면 명단부터 작성해야 합니다. 가칭 친일 독재 청산 블랙리스트, 국민 혁명용 블랙리스트, 재벌 해체용 블랙리스트, 공교육 정상화용 블랙리스트입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친일과 독재를 청산하려면 국민 중에 누구를 대상으로 골라야 하나요. ‘국민 혁명’은 혹시 ‘군사 혁명’처럼 초법적인 발상일 위험성은 없을까요. 재벌을 해체하면 중소기업의 투자와 노력만으로 4차 산업혁명의 바다를 힘 있게 항해할 수 있을까요. 막상 서울대를 없애면 또 다른 서울대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고교평준화 이후에 어려운 집 학생들이 더 어려워진 점을 이미 잊으셨나요.
편 가르기를 통한 다른 종류의 솎아내기 전략도 있습니다. ‘정치인 대 비정치인’의 틀을 씁니다. 머리들이 정말 좋습니다. 언제부터 정치를 했는지를 따집니다. 국내에서 활동했는지, 아닌지를 따집니다. 솔직히 정치인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분들도 다들 전에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셨나요. 그리고 아직은 스스로 뜻을 밝히셨지 소속 정당의 경선을 거치신 것도 아니지 않나요. 솎아내려는 명분이 좀 헷갈립니다. 이 말 저 말 바꿔서 하시는 그분들의 정체성조차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재고’보다는 ‘신상품’을 더 좋아하는 소비자도 많이 있습니다.
정치권이 ‘솎아 내기’ 전략과 함께 흔히 쓰는 다른 전략은 ‘흠집 내기’입니다. 끌어내리고 싶은 후보에 대해 근거가 없어도 일단 그럴듯한 이야기로 꾸며서 나쁜 소문을 퍼뜨립니다. ‘아니면 말고’입니다. 오래전 대선에서 어떤 분이 정말 크게 재미를 보았던 일, 아직 기억하시나요. 아마 상대방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로 포장된 문제였지요. 이런 식의 흠집 내기는 블랙 라이(악의 있는 거짓말)라고 하는데, 블랙리스트의 사촌쯤 됩니다.
왜 사람들이 남을 혹독하게 비판하다가 스스로 닮아 가는지 궁금하신가요.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런 일은 아주 흔합니다. 시어머니 욕을 하다 시집살이 더 힘들게 시키는 시어머니로 거듭나는 며느리, 흔합니다. 사장 욕하다가 사장이 되자마자 아랫사람을 더 혹독하게 대하는 신임 사장, 찾기 쉽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정신분석 용어로 어렵게 말하면 ‘공격자와의 동일화’라고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5000만 명이 넘는 대한민국 국민의 장래를 수년 동안 책임지시겠다는 대권 후보들의 말씀 안에는 인정스러움, 포용, 배려하는 마음, 협상과 타협으로 합의점을 찾겠다는 고뇌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 표, 한 표를 긁어모아 산술적으로 확률이 높은 대권 놀이를 할지에 대한 전략과 전술만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그분들에게는 한 표, 한 표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살아 숨 쉬는 국민이 아닌 한 표일 뿐입니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배, ‘대한민국호’의 선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승객이나 장비를 함부로 버릴 수는 없지 않나요. 구명정을 버리고 나서 뒤늦게 후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경제를 위해서 안보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군 복무기간 확 줄이면 나라는 누가 지키나요. 특정 대학교가 아닌, 기형적인 입시제도가 근본적인 문제 아닌가요. 지금 대권 후보들의 행태는 그저 관심을 끌어 표를 모으면 된다는 단순 전략인데, 나라의 앞날을 더 어렵게 만드는 자해적인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군대 가서 3년 넘게 복무했습니다. 세금 꼬박꼬박 냈습니다. 30년 넘게 공직에서 환자 진료하고 학생과 전공의를 가르치고 연구해서 논문 써서 국내외에 발표했습니다. 이제 65세가 되었습니다. 나갑니다, 나가요! 서울대에서! 누군가들의 마음에 들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선거에 쓸 내 표, 달랑 한 표이기는 하군요. 정치인들이 뭐라고 말들을 하더라도, 저는 대한민국 정말 사랑합니다. 65세 생일 다음 날부터 지하철 무료 교통카드 받아 잘 쓰고 있습니다. 허 참! 말만 많은 세상 돌아가는 꼴이 묘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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