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

국적이 계급인 이 더러운 세상

꿈 꾸는 소년 2018. 12. 1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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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03:00: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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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부형권]국적이 계급인 이 더러운 세상

부형권 국제부장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2장 10조다. 여느 나라의 헌법에도 비슷한 조항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기본, 국가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올 한 해 국제뉴스룸에서 바깥세상 소식을 전하면서 자주 느꼈다. 그 기본과 그 기초를 지키는 일이 참 어려운 것이구나.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나라를 골라 태어나지 못했을 뿐인데 천형(天刑) 같은 고통을 겪는 지구촌 사람들이 참으로 많구나.

시리아는 8년째 내전(內戰) 중이다. 40만여 명이 숨졌고, 전쟁 난민은 수백만 명이다. 다치고 죽고, 정든 집을 떠나는 모습이 일상이 돼 버렸다. ‘일상’은 뉴스거리가 잘 되지 않는다. 매일 소중한 생명이 사라지고, 행복을 추구할 기본권이 말살되는데도 세상은 점점 이 나라에 둔감해진다.

7월 국제뉴스룸은 축복받아야 할 아이의 탄생을 ‘또 하나의 비극’이라고 보도해야 했다. 미얀마 군부가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로힝야족 여성들을 상대로 자행한 성폭력이 만들어낸 생명들 이야기였다. 군인들은 여성의 나이, 결혼 여부, 자식 유무를 가리지 않았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방글라데시 난민 캠프에서 직접 인터뷰한 로힝야족 여성 52명 중 28명(53.8%)이 성폭행 피해를 진술했다. 그렇게 생긴 딸을 낳은 한 산모는 “너무 예쁘지만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엄마들과 이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나.

미국 중간선거(11월 6일)의 주요 이슈였던 중미(中美) 국가 출신의 대규모 이민자 행렬 ‘캐러밴(caravan)’ 뉴스도 현재진행형이다. 고국인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를 등진 캐러밴이 ‘기회와 희망의 나라’ 미국 국경에 도달하려면 4000km 이상 이동해야 한다.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약 400km)의 10배. 한 시간에 4km씩, 매일 10시간씩 걸어도 100일이 꼬박 걸린다. 이런 고난의 행군이 어떻게 가능할까? 캐러밴의 대답은 같다. 고국에선 인간답게 살 수가 없어서, 미국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있을 것 같아서.

“포탄 맞은 산야는 황폐하고, 사람들은 정말 가난하고 절망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솔직히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건 또 어떤 비극의 나라일까.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의 세계적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틴 씨(91)가 2년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1960, 70년대 우리 집에선 ‘가난한 나라’ 한국에 자선기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 돈을 받은 한국 가정이 지금은 우리 집보다 더 부자가 돼 있을 겁니다.”

‘한국민이 이민 가고 싶은 나라’를 조사하면 캐나다와 함께 톱2로 꼽히는 뉴질랜드의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에게서 8월 인터뷰 때 들은 얘기다. 그랬던 한국이 지금은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다(국제통화기금·IMF 2018년 자료). 자선기금을 보내던 뉴질랜드는 50위인데 말이다.

대한민국도 시리아 같던 시절이 있었다. 그 국민은 캐러밴보다 더 힘든 여정을 지나와야 했다. 터너 대사는 ‘한국이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간단명료하다. ‘기적의 나라’다”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궈낸 ‘기적의 나라’를 더 좋은 ‘기회의 나라’로 만들어 우리의 아들딸, 손자손녀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권력을 누리는 기득권 세력, 기자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피할 수 없는 숙제다.
 
부형권 국제부장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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