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 42:1~6>
♧ 모든 인간은 고통을 직면한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직면합니다. 어린 자녀들에게도 키가 커가면서 겪는 성장통이 있습니다. 중학생들에게는 중2병 사춘기의 고통이 있습니다. 청년이 된 자녀들에게는 불확실한 진로 속에서 겪는 서른통이 있습니다.
또 어떤 고통이 있습니까? 독박육아로 독박가사로 지칠 대로 지친 주부들에게는 남편들은 잘 모르는 근육통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직서를 던지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가장들에게 가장 힘든 고통! 가장통이 있습니다. 연로한 노인들에게는 만성질환이라는 신경통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을 각자의 삶 속에서 고통을 겪고 살아갑니다. 모든 인간에게 가벼운 고통은 없습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고통의 순간마다 타임아웃 버튼이라도 있다면 누르고 싶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왜 하필 나에게 왜 하필 지금이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며 하나님과의 소통의 문제를 겪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욥도 그랬습니다. 스크래치(scratch) 하나 없던 가정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았던 이웃 스바 사람들이 쳐들어와서는 욥의 가축들과 종들을 죽였습니다.(1:15) 또,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져서 하루아침에 양떼와 목동이 모두 타 죽었습니다.(1:16) 갈대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서 욥의 낙타와 종들을 죽었습니다.(1:17) 설상가상으로 장남에 집에서 함께 파티를 즐기던 자녀들이 갑자기 불어온 태풍으로 죽고 말았습니다.(1:19)
여기서 고난이 끝나면 좋으련만 시즌 2가 있습니다. 욥이 극심한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기왓장을 가지고 긁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옆에서 아내는 말 폭탄을 던집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2:7~9)
그것을 끝나지 않습니다. 시즈 3가 있습니다. 욥에게 찾아온 친구들은 회개할 거 없냐고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처럼 욥기 전체를 통해 고난의 아이콘 욥은 사람들과의 소통의 문제를 겪게 됩니다. 시즌 3까지는 욥은 시련을 잘 이겨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기 3장에서 욥은 하나님을 저주합니다.(3:1) 방금 전까지 아내와 친구들의 말 폭탄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역대급 신앙고백을 한 욥이 왜 갑자기 돌변했을까요?
욥의 인생의 마지노선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마음의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 남편의 연봉도 여기까지 자녀의 대학도 여기까지 아파트 평수도 여기까지 감정의 상태도 여기까지 더 이상 내려가게 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는 거야 하는 마지노선입니다.
역대급 신앙고백을 하고도 우리가 생각하는 마지노선이 무너질 때 욥기 3장의 욥의 모습처럼 예상 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마음의 변화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마지노선이 무너지는 고통의 밤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을 무엇일까요?
1. 고통의 밤은 하나님을 향한 진심을 확인하게 한다.
욥기서를 보면 욥아 겪고 있는 고통의 밤 배후에 1장과 2장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여호와께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라고 질문합니다. '까닭 없이'의 뜻은 '사심 없이' 라는 뜻입니다.
사탄의 논리는 욥의 경건한 하나님이 그를 번영케 해주시고 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셨기 때문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욥에게 복을 거두어 가시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향한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하실까?
사탄은 까닭 없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욥을 통해서 사탄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왜 우리에게 고통이 필요합니까? 고통이 밤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편의 시편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슴을 지키나이다.(67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
지금 고통의 밤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 밤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진심을 확인하길 원하십니다. 사탄은 형통 때문에 하나님은 믿는다고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고통의 밤에 형통이 아닌 고통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심을 고백하길 바랍니다.
2. 인생의 결론은 고통의 밤을 초월하는 하나님이다.
42장의 욥의 고백은 38~41장까지 하나님께서 폭풍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고통의 밤이 오기 저전 에 알았던 하나님보다 더 크신 초월하심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욥에게 폭풍처럼 다가와서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의 밤을 지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욥은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다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답답한 인생이지만 하나님 한 분이 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통의 밤을 초월하신 하나님이 인생의 결론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 이유 없는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고통의 밤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의 고통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이론에 갇히지 않는 하나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고통의 밤을 초원하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결론이 되길 원합니다.
3. 고통의 밤은 귀의 지식을 눈의 지헤로 만든다.
욥은 귀로 듣기만 하였던 지식이 아니라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는다고 고백합니다.(5절) 욥은 단순히 창조의 능력만 행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합니다.
이 말은 욥이 이전에 고백했던 추상적인 지식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청교도 토마스 브록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최고선이 고난을 통해 오듯이 하나님이 성도들로부터 받는 최고의 영광은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 온다." 이처럼 고통의 밤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진심!
반짝거리는 십자가의 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물과 피를 쏟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이 현장에 여전히 임재하고 계시는 주님을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게도 마지노선을 넘는 고통의 밤이 있었습니다. 만왕의 와이요! 우주의통치자이신 우리 주님은 그 선을 넘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에 비할 바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까지 경험하셨습니다.
고통의 밤을 보내고 계십니까? 우리가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그 밤을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으신 그 주님을 영접할 때 우리 주님과 소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소통이 없는 아무런 문제 없는 형통이 축복이 아니라 고통의 밤이라도 귀의 지식이 아니라 영안이 열려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임재하시는 주님을 본다면 그 고통을 통해 주님과 소통하는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고통의 밤을 보내고 계신다면 귀의 지식이 눈의 지혜로 바뀌는 통(아프다)해야 통(통하다)하는 축복이 우리의 삶에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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