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화순군 화순읍 군소재지 중앙이 고향 입니다. 건너에는 군청이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5일 시장은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和順이라는 지명은 화자는 “혼화하다. 화목하다”는 뜻이고, 순자는 “온화하다. 따르다”라는 뜻이며, 지명 그대로 “온화하고 양순한 곳입니다.
산 면적 85% 가까이 차지하여 아름다운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인지 당시 50년대는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유독 농토가 적어 더욱 가난한 곳이었습니다.
자란 환경과 고향은 성격 형성에 중요한 것 같습니다.
고향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부러워하는 환경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하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계셔서, 논 100마지기를 팔아 대동상회라는 큰 부동산을 구입하여 아버지에게 물려 주셨다고 합니다.
집안은 군소재지 중심 5일 시장 중앙에 큰 부동산 상가 등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일제시부터 군 지역을 분할하여 지금으로 치면 백화점 같은 대동상회라는 큰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군의 반은 일본사람이 반은 아버지가 상품을 공급하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아비지도 새벽마다 예배 참석하시던 신실한 집사님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절대적인 맹신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사의 아픔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조부모의 가슴 아픈 가족사는 우리나라의 굴곡의 현대사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2명의 자녀들을 두셨지만 병으로 7명의 자녀들을 떠나 보내시고, 3남 2녀 중 전란 통에 큰 아들을 잃고, 둘째는 좌익에게 붙들려가서 행방 불명으로 되고, 막내 아들은 참전 용사로 두만강까지 참전한 상이용사로 당시 성경고등하교까지 공부한 막내 아들은 가문의 상실감으로 기대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좌절감이 얼마나 크셨을까?
할아버지는 다른 무엇에 의지 할 길이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시는 맹신적인 믿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여력은 있으셔서 교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셨고 일제 때 교회에 종을 헌물하셨는데 도에서 3개 명품으로 지금도 그 종이 남아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헌물하셨던 종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고향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이었으나’ 1950년 한민족의 최대비극인 한국전쟁은 우리 집안의 행복과 평안을 모두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50년 지역의 좌.우 이념의 대결로 인한 희생양으로 아버지는 30살에 3남 1녀를 남겨 두고 돌아가셨습니다.
3살 되던 해였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물론 얼굴 조차도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부르기도,듣기에도 어색함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또한 아버지는 단어는 명사로서는 마음속에 존재하지만, 동사적인 의미의 행위 아버지는 전혀 제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롤모델이 없어서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애로 사항을 많이 겪으면서 자녀들에게도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 마저도 14살 되던 해 중학교에 입학하여 얼마 되지 않아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금슬이 참 좋으셨다고 합니다. 그리움에 떠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형, 누나. 유복자남동생 4형제가 남아 7살 위인 형이 가장이 되고 2살 위인 누나가 살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입학 얼마 되지 않아 형은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형이 입대하던 날 나는 기차 통학을 하기 위해 5리를 걸으면서 한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깜깜한 길을 걷고 걸었던 기억이 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살아갈 길을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나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어 갔습니다. 상실에 두려움이 나를 사로 잡았습니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은 하나 둘 떠나가는 아픔에 이별은 두렵고 생각 조차하기 싫어 졌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싫어졌고, 사람 앞에서기가 두려웠습니다.자신감을 잃어가다 보니 말을 더듬어 갔습니다. 성장하면서 치유되면서 많이 고쳐졌지만 지금도 긴장하거나 여러 사람 앞에 서면 더듬는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내가 애절하게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그렇게도 많이 불렀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결혼하여서는 양희은의 “부모”를 부르곤 하여 18번 되었고 가사를 지금도 유일하게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마음속 깊이 잠겨 있던 분노가 분출하여 제 자신도 자제하지 못할 때가 많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때론 아내에게 자녀에게, 직장. 교회에서 내 자신도 절제하지 못하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2001년 가을에 아내의 권유로 속초 “부부사랑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을 통해, 조별 모임에서 훌륭하신 리더를 만나 목사님 부부, 다른 장로님 부부 등 고백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일생에서 가슴속에 맺혔던 회한의 눈물을 통곡하면서 쏟아내었습니다. 본래 눈물이 많은 감성이 풍부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성품인데 눈물에 대한 축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생에서 한 없이 통곡하며 울었던 기억은 어머니를 떠나 보내면서 울었고. 속초에서 울었고, 나를 길러 주었고 학교를 통학시켰던 누나를 하늘나라로 떠나 보내면서 가슴속 깊은 눈물을 폭포수 같이 흘렀던 기억이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상처는 없습니다. 그리움과 상실에 대한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과 믿음의 유산은 내 가슴속 깊이 자리잡아 부모를 일찍 잃었지만, 언제나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의 씨앗이 나를 지탱해 주었고 오늘까지 살아가는 자양분이었습니다.
나에게는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가족, 가문을 일으켜야 하는 과업이 항상 마음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기울어 졌던 가문을 일으키고 싶은 간절한 소망과 갈망 때문에 입니다. 가문에 대한’ 가족에 대한’ 부채이자 부담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많은 혜택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건강 축복을 해 주셨고,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좋은 직장에서 정년 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형님과 누나 그리고 동생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대의 변화와 정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성하여 생각하여 보니 시대의 변란이 나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사회가 옳지 않는 길로 가거나, 정당하지 않는 길로 가는 것을 좌시하지 않고 울분을 토하고, 개탄을 금치 못하고, 참여하여 하는 모습에서 제 자신이 깜짝 놀라곤 합니다.
지금도 매일 신문과 매스컴의 시사문제는 열성적으로 탐독하고 지켜보기도 하고, 참여하기도 합니다. 체질화. 습관화가 되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어떤 분야는 전문가 수준에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식견에 제가 놀라곤 합니다. 32살 때 고향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겪었던 5.18민주화 운동의 아픔입니다. 현장에서 목도했고 참여를 통해서 보아왔기 때문에 진실이 왜곡되고, 와전되는 현실에서 좌절감을 넘어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을 때도 있었습니다.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는데 많은 크리스천들은 침묵하절절히 느꼈습니다.
정태기 원장님과 크리스천치유원은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같습니다.
2천년초 직장에서KBS특강에 정태기 원장님이 오전 10경 몇 차례 출연하셔서 특강을 하시던 기억이 남습니다.
첫 회는 목소리나 외모로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계속 경청하다 보니 나의 아픔이고, 이야기이고, 우리들의 아픔이고, 이야기 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상처 없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상처가 없습니다. 남편의 아픔과 상처 알고 치유하기 위하여 치유원을 수료하고 나에게 강력하게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직생활에서 시간이 낼 수 없었는데 정직퇴직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미 눌 수가 없는 과업으로 여겨 결단하고 오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계셔서, 논 100마지기를 팔아 대동상회라는 큰 부동산을 구입하여 아버지에게 물려 주셨다고 합니다.
치유공부를 통해서 나의 남은 상처도 치유하는 것이 목표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동생 유복자는 이 시대의 아픔과 가족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격으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볼 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남은 인생 상처 받은 치유자로 교회에서, 사회에서, 봉사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한민족은 한의 민족입니다.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이 많은지 모릅니다. 치유원의 역할 매우 크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하심이 있기를 늘 기도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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