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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꾸는 소년 2011. 12. 29. 12:04

너 릿 재

○ 너릿재는 광주시 동구 선교동(초봉골)과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 입구(재물통골) 사이에 있는 고개

- 지금은 고갯마루 아래에 뚫린 길이 400m의 터널을 가로질러 고개를 넘지만 1960년대까지도 해발 232m(1917년 지형도 기준)의 고갯마루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비포장 길(약 6km)을 타고 넘어야 했다.

- 역사적으로 광주와 화순 읍내를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이며, 보다 넓게 보면 광주와 전남 동부지역을 잇는 고개이기도 했다.

-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넘나들었겠지만 그 중에는 유명 인사들도 많았다. 기묘사화(1519년) 때 조광조가 이 고갯길을 넘어 화순 능주에 유배를 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광주사람 박상이 현재 원지교에서 멀지 않는 분수원(分水院)이란 주막에서 조광조를 떠나보내며 지은 시가 <정암집>과 <눌재집>에 전해진다.

- 중요한 교통로였던 만큼 여행자의 편의를 위한 시설도 고개와 접속된 길을 따라 많이 산재했다. 광주에서 너릿재에 이른 길에는 원지교 일대의 원머리마을(학동 평화맨션 동쪽), 녹동마을 건너편의 원지실골(소태동 170번지 일대) 및 원두골(소태동 165번지 일대), 내지교 근처의 원골(선교동 441번지 일대) 등 ‘원’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이는 과거에 원(院), 즉 주막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간혹 ‘원’이 들어간 지명을 원(怨)이 서린 에피소드와 연결지어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후대에 갖다 붙인 해석이다.

- 20세기 초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따르면, 이 연로에 늘어선 주막들이 기록되어 있다. 즉, 교동마을에는 교항점(橋項店), 태봉마을에는 원동점(院洞店), 주남마을에는 사암점(沙巖店), 소태마을에는 소태실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교항점(橋項店)은 선교동 선동마을과 교동마을 사이에 있던 다리를 끼고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순우리말로는 ‘다리목 주막’이란 뜻이다. 태봉마을의 원동점(院洞店)은 원골에 있는 주막이란 의미다. 주남마을의 사암점(沙巖店)은 한자표기에 특별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니듯 하다. 사실은 ‘삿바우 주막’이라 불렸던 것을 이렇게 표기한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소태마을의 소태실점은 말 그대로 소태골에 있는 주막이란 뜻이다. 한편, 너릿재 너머 화순 이십곡리 입구에도 ‘원모퉁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이곳에도 주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너릿재는 옛 문헌과 지도에는 판치(板峙)로 표기되어 있다.

- ‘판치’이라고 기록한 고문헌으로는 <여지도서>, <광주읍지>, <화순읍지> 등이 있으며,

- ‘판치’ 또는 ‘판치영액’이라고 표기한 고지도로는 <여지도> 전라도 지도, <팔도지도> 전라도지도, <해동지도> 광주목 및 화순현 지도, <지승> 화순현 지도, <비변사인 방안지도> 전라우도지도, <광여도> 화순현 지도, <1872년 화순현 지도>, <해동지도> 광주목 지도, <지승> 광주목 지도 등이 있다.

- ‘판치’라 함은 너릿재의 정상부가 비교적 평탄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정상부를 오르내리는 비탈길은 좁고 험했다. <비변사인 방안지도> 광주지도의 주기(註記)와 <광여도> 광주목 지도에 너릿재를 ‘판치험애(板峙險阨)’ 라고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 너릿재를 넘는 일이 수월치 않았던 것 같다. 1932년 8월 화순읍에서 광주읍내로 외를 사러오던 한 남자가 너릿재를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해 여름은 폭서가 쏟아지던 때였는데 이 남자는 더위를 먹고 고갯길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동아일보 1932년 8월 4일자). 이런 기록은 너릿재를 넘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는 많은 사건들 가운데 단편적으로 전해진 일부였을 것이다. 험한 고갯길 자체로 인하여 탈진을 일으키게 했던 것 외에도 고갯길을 넘을 때는 치안공백에 따른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1960년대에는 전남 동부 연안에 접안한 밀수선에서 내린 밀수품이 이 고개를 넘어 광주에 반입됐던 일도 있었다(동아일보 1960년 1월 5일자). 또한 1950, 60년대에는 고개를 넘는 사람들을 약탈하려는 강도들도 많았다고 전해진다(<광주1백년> 저자 박선홍 증언).

○ 너릿재의 중요성이 특별히 부각된 것은 차량이 통과하면서부터였다.

- 1920년대부터 광주와 전남 동부지역을 연결하는 자동차들이 정기적으로 이 고갯길을 넘었다. 1930년대 광주~여수 간 경전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실상 이 고갯길이 광주와 전남 동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근대교통망이었다. 그러나 자동차 운행과 더불어 가파른 비탈길 아래로 차량이 추락하는 사고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 너릿재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기록은 1920년대부터 보이기 시작한다(동아일보 1926년 2월 26일자). 이후에도 사고기록은 거듭된다. 1967년 3월 17일에는 고흥에서 광주로 오던 광주여객 시외버스가 추락해 35명의 중경상자를 냈고(동아일보 1967년 3월 18일자), 1977년 5월 2일에는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던 광성여객 시외버스가 전복해 사망 4명, 중경상자 80여명이 발생하는 사고가 있었다(동아일보 1977년 5월 3일자).

- 폭설과 폭우로 고갯길 통행이 두절되는 일도 많았는데 1965년에는 기상악화로 연중 10여일, 1966년에는 20여일 동안 차량운행이 중단됐다는 기록도 보인다(<광주상공회의소 40년사>).

- 일부 사람들은 너릿재의 어원이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널’(관)이 이곳을 오르내렸다고 해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실제로 1894년과 95년 사이의 겨울에 동학농민군이 너릿재 동쪽 화순의 이십곡리 입구에서 집단학살을 당했고(이형권, <문화유산을 찾아서>, 1997), 1947년 여름에는 화순탄광노동자들이 광주시내로 진출하려다가 미군과 경찰에게 저지당하며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1980년 5월에도 이 고개와 이어지는 광주 주남마을 앞 도로에서 진압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벌어졌다. 삶을 이어주는 너릿재가 왕왕 죽음과 연상되는 고갯길로 비쳐진 것은 이처럼 너릿재를 둘러싼 우리네 삶이 녹록치 않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너릿재가 광주~화순 삶과 역사에 얼마나 중요한 길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교통량 증가와 함께 교통사고도 증가하면서 고갯길의 개선 필요성이 높아졌다.

- 지금의 너릿재 터널은 1967년 4월 착공해 1970년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굴착에 성공했고 이듬해에 이 터널과 연결된 지금의 직선 도로(22번 국도)까지 완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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