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태현]잘살아보세 2.0
김태현 중앙대 교수 국가대전략연구소장
굶주리는 조카들을 위해 한 조각 빵을 훔쳤다가 5년형을 받았다. 굶고 있을 조카들이 눈에 밟혀 탈옥을 거듭한 끝에 모두 19년형을 살고 가석방됐다. 전과자에 대한 시선은 차가웠다. 아이들은 돌을 던지고 개는 으르렁거렸다. 옥살이도 억울한데 이런 대우라니. 세상을 저주했다. 한 사제(司祭)의 도움을 받았지만 은식기를 훔쳐 도망쳤다.
곧 잡혔으나 은촛대를 더 챙겨주는 사제에게 감화를 받아 새사람이 됐다. 세월이 흘러 성공한 사업가이자 존경받는 시장 마들렌으로 거듭났다. 집요하게 뒤를 쫓던 형사 자베르는 애먼 사람이 장 발장으로 체포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장 발장은 고민한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난 시장 마들렌인가, 도망자 장 발장인가. 정체를 밝히면 도로 범죄자가 된다. 정체를 감추면 개과천선의 의미가 없다.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결국 정체를 밝히지만 자신의 공장에서 쫓겨나 어렵게 살다 죽어가는 여공 팡틴을 만나 딸 코제트를 부탁받고 다시 탈출한다.
학대받던 코제트를 구해 곱게 키운다. 코제트는 귀족 출신 혁명청년 마리위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장 발장은 실패한 혁명에서 총상을 입은 마리위스를 구출한다. 그 와중에 혁명군의 포로가 되어 처형을 기다리던 자베르를 풀어준다.
감방에서 태어난 자베르는 형사가 되어 평생 법의 엄정함을 위해 살았다. 장 발장을 체포할 결정적인 순간 구명의 은혜를 떠올리고 체포를 포기한다. 그 대신 센 강에 몸을 던진다. 법의 집행을 포기한 순간 그는 더이상 형사가 아니었다. 형사가 아닌 자베르의 삶은 의미가 없다. 정체성은 생명보다 중요하다.
장 발장의 보살핌 속에 곱게 자라 숙녀가 된 코제트는 노래한다.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과거를 알 수 없는 아버지, 당신은 누구인가요? 장 발장이 생명의 은인임을, 또 그의 과거를 알게 된 마리위스가 답한다. 당신 아버지는 성자(聖者)요.
온갖 고난 속에 정체성을 찾아 삶을 완성한 장 발장은 성자가 됐다. 형사로서 정체성을 잃은 자베르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코제트가 성자의 딸이 아니라 범죄자, 도망자의 딸로 살았더라면 그 여생이 어떠했을까. 자신의 원래 모습,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 향상시키는 과정, 그것이 삶이 아닐까. 영화를 보고 느낀 감상이었다.
방학을 맞아 미얀마에 온 지 2주일이 넘었다. 양곤 시내에는 활력이 넘친다. 열흘을 머물면서 호텔을 네 번, 방은 일곱 번을 옮겨야 했을 정도로 외국인이 몰려온다. 수도 네피도에서 9개 부처를 방문했다. 부처마다 나름대로 개발을 독려하는 구호가 쓰여 있었다. 미얀마판 ‘잘살아보세’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자라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노래다. 그 노랫말대로 우리는 500년래 민족 최고의 성세를 살고 있다. 그 노래의 방점은 “잘살아보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우리도 한번”에 있었다. 자원이 없는 좁은 땅에 넘치는 인구를 가진 대한민국이 성장한 비결은 ‘우리’라는 국민 정체성에 있었다.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가난에 절망한 국민을 ‘우리’로 묶었다. 함께 잘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개방을 통해 일거리를 만들었다. 서독에서 광원과 간호사로 고생하는 국민을 만난 대통령의 목이 메었다. ‘우리’로 거듭난 국민이 신명나게 일했다. 그렇게 하여 오늘의 성세를 이루었다.
미얀마 정부에 따르면 미얀마 개발 프로그램은 3단계로 전개된다. 정치 개혁→경제 개혁→행정 개혁의 순이다. 정치 개혁이 먼저인 게 특징이다. 정치 개혁은 민주화고 민주화란 곧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가 정착하고 민주주의가 공고해져 주인의식으로 뭉친 국민이 신명나게 일하면 미얀마는 성공할 것이다. 북한 지도부가 보고 배우면 좋겠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다시 한번 잘살아보세”를 통해 선진국의 문턱에서 허덕이는 우리나라를 다음 단계로 이끌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비결도 국민 정체성에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노래와 구호로 국민 정체성에 호소하던 시대는 끝났다. 정치 개혁을 통한 국민 통합이 필요하다. 이념 대결을 빙자한 권력 투쟁과 그로 인한 분열을 불식하고 정치적 경쟁을 국가 경쟁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정치 개혁,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개헌도 한 방법이다.
‘경제대통령’이 살리지 못한 경제를 살리려면 ‘정치대통령’이 필요하다. 분열의 정치가 아닌 통합의 정치가 펼쳐질 때 국민은 “대∼한민국!”을 노래하며 신명나게 일할 것이다. 그러면 박근혜 대통령은 ‘잘살아보세 2.0’으로 기억될 것이다.
김태현 중앙대 교수 국가대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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