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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태현]눈 오는 날의 4차원적 몽상(夢想)

꿈 꾸는 소년 2012. 12. 16.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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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토) 03: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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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태현]눈 오는 날의 4차원적 몽상(夢想)

김태현 중앙대 교수·국가대전략연구소장

함박눈이 내리던 5일 강북강변도로에서 두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눈길에 미끄러진 차들이 추돌사고를 낸 때문인데, 중앙분리대가 있는 길이었기에 망정이지 정면 충돌사고도 남 직한 날씨였다. 눈 온다고 강아지처럼 좋아하며 재잘거리는 아내의 전화를 짜증스레 끊고 괜히 밉살스러운 앞차를 노려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

도로에서 충돌이나 추돌사고가 자주 나는 것은 자동차가 선을 따라 주행하기 때문이다. 수면을 항행하는 선박이나 공간을 비행하는 항공기가 정면충돌이나 후면추돌 사고를 냈다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시간을 여행하는 타임머신이 충돌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겠다.

유식한 척하자면 선(線)을 따라 주행하는 것은 1차원적 이동이다. 그렇다면 면(面) 위를 항행하는 것은 2차원적 이동, 공간(空間) 속을 비행하는 것은 3차원적 이동이다. 시간을 여행하는 것은 4차원적 이동이다. 아, 아직도 우리는 1차원적 삶을 살고 있구나!

그래서 우리의 사고가 1차원적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 올해 들어 부쩍 잦은 지역 내 영토분쟁,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 국제정세가 유난히 어지러운 가운데 펼쳐지는 대선정국에서 후보들이 외교안보 문제에 침묵하는 것도 그들의, 또 우리의 사고가 1차원적이라서가 아닐까.

양자택일 강요하는 1차원적 사고

지난 정부 시절,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둘러싸고 뜨겁게 논쟁한 적이 있었다. 주한미군이 자유롭게 이동한다면 향후 일어날 미중 패권전쟁에 말려들지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부는 오랜 협상 끝에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표현을 얻어냈다.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외교적 자산을 희생했을지 모를 일이다. 미군이 주둔하는 다른 많은 나라에서는 애당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이다.

지난봄, 총선을 앞두고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논쟁의 대상이 됐다. 반대론자들은 제주 해군기지가 미국의 대중국 봉쇄를 위한 전초기지가 되어 한국이 미중전쟁에 휘말리는 단초가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1차원적 사고다. 혹은 냉전적 사고다. 냉전시대의 미소관계가 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의 미국과 소련은 경제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철저히 격리돼 있었다. 오로지 서로를 궤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그리고 제3세계 지역에서의 영향력 경쟁만이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선이었다. 그 선상의 게임은 한쪽이 이기면 다른 쪽은 지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충돌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그 충돌의 결과가 너무나 끔찍스러워 충돌 직전에 멈췄던 것이 1962년의 그 유명한 쿠바 미사일 사태다.

오늘의 세계는, 그리고 미중관계는 그와 판연히 다르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제1의 무역 파트너다. 양국의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차이메리카(Chimerica)’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세계 제1위와 3위의 인구대국 간 사회문화적 교류도 냉전시대에 비교할 수 없다.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적당한 표현어가 없을 정도로 교통통신기술이 발전한 디지털 문명의 시대다. 군사적 대립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기엔 무기의 파괴력이 너무나 진보했고 경제가 너무 발전하고 또 상호의존적이 됐다. 환경, 질병, 마약, 범죄, 테러 등 국가를 뛰어넘는 초국가적 문제가 너무나 중요해졌다.

이 모든 가치가 중첩돼 이루는 오늘날의 세계는 1차원의 선이 아니고, 2차원의 면도 아니며, 최소한 3차원의 공간이다. 그 모든 것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니, 사회과학자인 필자가 상상하기엔 역부족인 4차원의 세계가 아닐까.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사회의, 국가의 삶은 어떻게 꾸려야 할까.

그런 세계 속에서 국가사회를 이끌고 복합적 공간과 시간 속을 헤쳐 나가는 지도자의 상은 무엇일까. 이제 선거가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는데, 향후 5년의 세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데 누구를 뽑아야 할까.

1차원적 사고에 머물러 민족인가 동맹인가, 미국인가 중국인가, 마치 엄마 좋아 아빠 좋아와 같은 유치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후보, 혹은 그런 세력을 대표하는 후보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처럼 유치한 질문에 대답이 궁해서 상대가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며 침묵하는 후보도 별반 나을 게 없다. 답답하다.

새 대통령은 4차원적 시야 가져야

갑자기 들려오는 경적 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앞차가 저만큼 전진해 있다. 가속페달을 밟으며 생각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보는 4차원적 시야를 가지고 복합적 공간을 뛰어넘는 3차원적 행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참 좋겠다. 그러면 세종대왕 이후 500년 만에 맞는 이 민족의 최고 성세를 앞으로 100년은 유지할 수 있겠다. 꿈을 꾸다가, 앞차를 추돌할 뻔했다.

김태현 중앙대 교수·국가대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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