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기 목사

[방선기 목사의 생활신앙(22)] 제사에 대해서

꿈 꾸는 소년 2013. 9. 9. 07:11

[방선기 목사의 생활신앙(22)] 제사에 대해서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합 대표)
2010년 09월 10일 (금) 08:44:53 기독신문 ekd@kidok.com

 
정체성 지키되 잘 설명하자

제사가 유일한 조상섬김의 방법 아님을 지적해야


   
  ▲ 방선기 목사  
추석이 다가오니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피할 수 없는 제사 문제가 생각난다. 교리적으로는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다. 제사는 우상숭배이니 크리스천은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 그러나 생활 현장에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이것 역시 생활신앙의 중요한 주제이다.

언젠가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분과 성경공부를 하는데 그 분이 느닷없이 말했다. “기독교에서는 제사를 안 지낸다고 들었는데 성경에 보니까 제사가 많네요.” 무슨 소린가 의아해하며 가만히 생각하니 성경에 제사가 많이 나왔다. 모세 율법에 수많은 제사가 나오고(출애굽기, 레위기) 그것의 완성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제사(히브리서), 그리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드려야하는 삶의 산 제사(롬 12:1, 히 13:15-16) 등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크리스천은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기 전에 두 제사의 차이를 설명해줄 필요가 있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는 어떤 형태이든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드리는 것이다. 전통적인 제사는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게 드리니 우상숭배이다. 그러니 제사를 드리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물론 요즘은 제사도 형식적이 되어서 변질된 것처럼 보이는 제사의 형식만 갖추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제사는 그 바탕에 우상숭배가 깔려 있으므로 크리스천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제는 그 때문에 기독교가 조상을 무시한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는 점이다. 성경은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것은 원하지 않지만 조상을 기리는 것은 무척 강조한다.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족보나 마태복음의 첫 장에 기록된 족보는 사람의 삶에서 조상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조상을 기억하고 조상의 덕을 기리는 것은 크리스천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제사에 상응하는, 아니 제사보다 훨씬 더 조상을 기리는 예식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크리스천들은 추석이나 조상의 기일에 추모예배를 드린다.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조상들이 남겨준 덕을 추억하고 그것을 나누는 순서를 꼭 넣을 필요가 있다. 그런 예식을 행한다면 제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조상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진정으로 조상을 섬기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한다고 비난하면 더욱 반발한다. 일단 그들을 인정해주고 다만 제사가 유일한 조상 섬김의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초기부터 시행되었고 제사의 원산지는 중국이요, 사대주의적인 유교학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민간에까지 보급한 제도라는 점을 알려줄 수 있다. 그러니 이 제사만이 한국인의 고유한 미풍양속이고 선조와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유일한 대접의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아울러 정말 조상을 향해 진정한 제사를 드리려면 조상의 조상들에게도 제사 드려야 하며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의 조상인 아담에게도 제사 드려야 할 것이다. 결국은 우리의 조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된다(눅 3:38).

크리스천들이 겪는 실제적인 문제는 믿지 않는 가족들이 드리는 제사를 거부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가족 간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마 10:16). 가족의 축제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되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절하는 것을 사양한다. 물론 이 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신앙적인 이유로 절을 드리지 않지만 가족들과 함께 조상들을 기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진실되게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절하는 것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혹시 그런 모습을 본다면 그들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엘리사를 통해 막 하나님을 믿게 된 나아만 장군이 자기의 주군이 우상에게 절할 때 어쩔 수 없이 옆에서 몸을 굽힐 수밖에 없는 것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때 엘리사는 강하게 도전하지 않고 평안히 가라고 했다(왕하 5:18-19). 이제 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이 문제가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움을 알 수 있다. 믿음이 성장하면서 제사의 의미를 깨닫고 결단하도록 조언하는 것이 좋다.

제사를 거부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칫 제사를 거부하는 것을 믿음의 조건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유대인들을 향해서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했다(갈 5:6).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 때문이지 제사를 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용감한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제사 문제는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는 시금석이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강조해서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