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겨냥한 6월25일자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석상의 발언은 장소, 절차, 그리고 내용이 모두 잘못됐다. 무엇보다 국무회의는 국정을 논하는 자리이지 대통령이 억한 심정을 표출하는 장소가 아니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파급력이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폭탄선언을 하려면 대통령은 비서실장, 정무, 홍보 등 비서관들과 사전에 협의를 했어야만 한다. 하지만 대통령 비서실장도 현장에서 비로소 그 내용을 처음 들었다고 하니 블랙 코미디라고 하겠다. 국회가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 법안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상황이라면 국무회의는 최소한 논의는 하고 통과시켜야 한다. 대통령의 격앙된 발언이나 듣고 침묵으로 안건을 통과시키는 국무회의라면 차라리 문을 닫는 게 낫다.
박 대통령은 여당 원내대표가 국회를 설득시키지 않고 무엇을 했느냐고 질타했는데, 그러면 대통령은 공무원연금 개혁을 위해 야당과 대화라도 한 적이 있는가. 야당과의 대화는 오바마 같은 ‘풋내기 대통령’이나 하는 것으로 안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해다. 동서 냉전을 종식시켜서 역사의 한 장(章)을 장식한 칠순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당시 야당 지도자이던 팁 오닐 하원의장과 수시로 만나고 통화하면서 법률안 통과를 부탁하곤 했다. 명색이 보수 정치인이라면 레이건의 리더십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들어보기는 했을 것이 아닌가.
박 대통령은 2012년 4·11 총선에서 다시는 다수당이 일방적 날치기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공약했고, 여야는 그 약속을 받아들여서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켰다. 국회선진화법이 존재하는 한 다수당 원내대표라고 하더라도 인내를 갖고 야당과 협상하는 수밖에 없다. 대통령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국회선진화법의 테두리 안에서 협상을 통해 공무원연금개혁안을 통과시킨 여당 원내대표를 대통령이 질타하고 있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혹시 박 대통령은 공무원연금 개혁에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배신의 정치는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를 초래한다”는 말도 생뚱맞기만 하다. 이 표현은 박 대통령이 고배를 마신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 들어맞는다. 2004년 총선 때 자신이 혼신을 다해 유세 지원을 했던 이재오 의원 등과 자신 덕분에 국회의원이 된 전여옥 전 의원 등 비례대표 의원들이 대거 이명박 대통령 쪽에 줄을 섰던 것은 박 대통령에게 아픈 기억일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힘들 때 자신을 지켜준 사람이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였다.
유 원내대표가 증세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 부분은 박 대통령에게 불쾌한 측면이 있겠지만 지하경제를 양성화해서 복지예산을 충당하겠다던 박 대통령의 구상이 허망한 것임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패권주의가 어떻고 줄 세우기가 어떻다는 말은 유 원내대표보다는 사무총장 등 당직 임명권을 갖고 있으며 또한 내년 총선에서 공천작업을 지휘할 김무성 대표를 향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친박 의원들이 대통령의 역정(逆情)에 편승해서 들고일어난 것도 우습다. 강경한 말을 쏟아낸 이정현 의원이야 원래 대통령의 집사 역할을 했던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유 원내대표를 앞장서서 비난한 김태호, 이인제 최고위원은 사실 박 대통령과는 인연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와중에 김무성 대표가 “나도 박 대통령하고 너무 가까워서 죽었잖아”라고 말해서 주목을 샀다. 필자가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자기를 아는 사람을 부담스럽게 여긴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언급이다.
박 대통령을 알아왔던 사람들이 대통령과 멀어지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문고리’와 ‘10상시’라고 불리는 ‘인(人)의 장벽’이다. 2012년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은 부친 시절의 과거사 발언으로 선거에서 패배할 뻔했다. 식견이 태부족한 주변 인물들이 제공한 잘못된 정보를 갖고 대통령이 인혁당 사건과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엉뚱한 발언을 해서 선거 캠프가 와해될 지경에 처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패턴이 있는 한 이 정부는 취약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는데, 불행하게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임기가 보장된다. 의회의 불신임 결의에 따라서 정부가 교체되는 의원내각제와 달리 대통령제 국가에선 아무리 무능하고 오만한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임기 내에 교체할 방도가 없다. 우리는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이란 ‘저주’에 연거푸 갇혀 있는 형국이다.
<이상돈 | 중앙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