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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박형주]호기심의 생산성

꿈 꾸는 소년 2016. 4. 28.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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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6 03:00: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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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박형주]호기심의 생산성

천재가 아니어도 노벨상 수상 목표 정하지 않은 獨 물리학자, 발견의 즐거움에 이끌려 성취 불교에 심취했던 日 수학자도 즐거운 연구로 수학 난제 풀어 호기심 날려 보내는 반복학습, 입시 교육에선 피할 도리 없어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큰 그림을 그려 가기를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인류 역사에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큰 업적을 낸 슈퍼맨이 차고 넘치는데, 천재와는 거리가 먼 사람 중에도 위대한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 인물은 없을까. 범인의 반란도 가끔은 일어나야 세상이 흥미롭다.

물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비밀을 요약하면 ‘호기심의 생산성’쯤 된다. 이건 우리나라 입시교육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반복학습의 중요성’과는 전혀 달라서 오히려 상반된 것 같기도 하다. 학창시절에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매진하라는 통상적인 충고와도 많이 다르다.

독일 물리학자인 테오도어 헨슈 교수는 2005년에 노벨물리학상 수상 강연을 하면서, 심오한 물리이론과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그림 하나를 화면에 띄웠다. 어미 닭과 병아리가 그려진 그림의 오른쪽에는 먹음직스러운 모이가 있고 배고픈 어미 닭이 가까이 가려 애쓰는 모습이다. 하지만 나무를 엮어 만든 장애물이 그 앞에 펼쳐져 있어서 헛되이 수고만 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런 와중에 모이 반대편 쪽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던 병아리는 어미를 두고 반대쪽으로 탐험에 나선다. 넓게 열린 공간에서 이곳저곳 들르다 보니 어느새 장애물 옆을 지나서 모이 앞에 다다른다. 어미 닭 위에는 ‘목적 지향의 연구’라고 쓰여 있고, 병아리 위에는 ‘호기심으로 하는 연구’라고 쓰여 있다.

헨슈는 스스로를 천재성과 인연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자신이 노벨상까지 받으며 위대한 물리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 사연을 이 그림에 표현한 것이다. ‘목표 따윈 버려라’ 같은 도발적인 메시지까지 읽힌다. ‘무엇을 이룰 생각(목적) 같은 건 없이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에 이끌려 살았는데, 어느새 먹음직스러운 모이(노벨상) 앞에 있더라’라는 통쾌함이랄까.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수학 분야 최고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도 천재와는 거리가 먼 범재였다고 말한다. 그의 자서전인 ‘학문의 즐거움’은, 잘 봐줘야 똑똑한 준재 정도였던 어린아이가 세계 최고의 수학자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필즈상을 수상한 업적인 ‘대수 다양체의 특이점 해소’라는 난해한 연구도, 세기의 천재가 짠 하고 나타나서 오랜 난제를 해결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히로나카는 온전한 피안의 세계가 현세에 투영되면서 번뇌로 가득한 현상의 세계가 된다는 불교적 관점에 심취했었다. 철학적 사색이 수학의 난제 해결로 이끄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자서전의 제목은 ‘즐거움이 만들어낸 성취’라는 메시지와 잘 어울린다.

호기심의 생산성이라는 관점과 대척점에 있는 게 반복학습인데, 반복해서 익숙하게 한다는 취지와 달리 재능 있는 아이를 질리게 해서 어정쩡한 성취에 멈추게 한다. 같은 내용을 반복할수록 흥미는 급격하게 떨어지고 아이의 호기심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유명 문제집을 몇 번 풀었는지 자존심 경쟁까지 한다. 현장의 교사는 문제점을 알면서도 전가의 보도인 반복학습을 피할 도리가 없다. 입시 중심의 교육체계는 짧은 시간에 많은 선다형 문제를 풀어야 하는 평가제도를 만들었고, 이래서는 ‘기승전 반복학습’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학교에서는 인류의 성취 일부를 선별해서 가르친다. 그중에는 구구단처럼, 외워두면 두고두고 사용하며 수고를 줄일 수 있는 것이 있다. 배우고 나서 그 기본 원리나 해결의 논리적 과정은 간직하되 세부 내용은 잊어버려도 무방한 것도 있다. 필요할 때 인터넷이나 책에서 찾아보거나, 논리적 사고의 과정을 통해 재현할 수 있다면 족하다. 컴퓨터에 능해 검색을 잘하는 것과는 달라서, 지식의 상호연계라는 큰 그림을 가지고 무엇을 찾아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얼마 전 73세의 노법률가가 미국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후 연구원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봤다. 서울지법원장을 지낸 분이니 평생을 바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인데, 정년퇴임 후 66세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물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은퇴 후에라도 이루고 싶었다고 한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과 호기심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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