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어 : 모든 것을 주께 하듯 하라<골 3:23>
☞ ,눅 23:39 ~ 43
□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반응
본문은 십자에 함께 달린 두 강도의 誹謗과 回心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이 두 강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言及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었고 두 사람 모두 십자가의 사형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행악잔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며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한편 강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르면서 자신과 또한 자신가 함께 못박힌 두 사람 조차도 구원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한 행악자를 꾸짖었습니다.(40절)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 어렇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은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하여 相當한 報應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41절) 이것을 보면 이 한편 강도는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출발은 언제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하여, 단순히 當面한 인생의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믿음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여기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나를 기억하소서
이렇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인정한 한편 강도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42절) 이 한편 강도의 소원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강도의 소원은 십자가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 만이 아니라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하라"고 요구했습니다.(39절) 그러니까 한 편 강도의 소원은 십자가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십자가를 벗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강도의 관심은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보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벗어버리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좀 편하게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를 지더라도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더라도 주님과 함께 좁을 길을 가기를 원하십니다. 편안하게 살기보다 주님이 계신 낙원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마침내 주님은 이 하편 강도의 마지막 선택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43절) 여기서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베뢰아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몇 년을 세상에서 떠돌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바로 낙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낙원은 어떤 곳입니까? 낱말의 뜻으로 보면 즐거운 동산입니다. 영어로는 paradise라고 합니다. 사전을 보면 paradise란? '걱정이나 근심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파라다이스는 주님이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파도가 있고 석양의 노을이 있고 아름다운 노래가 있어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닙니다. 낙원이 아닙니다. 천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황금길이 천국이 아닙니다. 열두 진주문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이 천국일 수 있는 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 그곳에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계21: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편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비방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기 만을 소원하다가 悲慘하게 인생을 마쳤지만 또 한 사람의 강도는 십작에서 내려오는 것보다 예수님을 선택하여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 살게 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생은 삶의 내용보다 선택이 중요합니다.
□ 왜 행악자는 이렇게 변화되었는가?
두 사람 모두 행악자였고 두 사람 모두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처음엔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을 했었습니다.(마 27:44) 그런데 두 사람 중에 한편 강도는 왜 이렇게 변화되었을까요? 왜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를 비방하는 자를 도리어 꾸짖고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며 예수님의 죄 없으심을 고백하였을까요? 왜 한 사람의 강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보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더 원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결과적으로 보면 주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감동과 감화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이 강도는 감동과 감화를 받았을까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절)
예수님은 용서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사람은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용서합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평정심을 되찾았을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현장에서 용서하셨습니다. 또 사람은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할 때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姑捨하고 자기들의 잘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용서하셧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강도는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한 편 강도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니 저분이야 말로 나를 구원하실 구세주이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 강도는 예수님의 기도로 인하여 감동을 받았고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가 한 사람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변화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었지만 죽어가는 마당에 예수님을 욕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한 편 강도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처럼 저는 우리 오륜의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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