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23~25>
□ 모든 성도들이 탄식하며 구원을 기다림
오늘 본문을 보면 피조물들만이 아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 역시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3절) 그러면 여기 처음 익은 열매란 무엇을 말할까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받은 현재의 구원을 말합니다. 왜 우리가 받은 현재의 구원을 성령의 처음 열매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되었고(고전12:3)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거듭났고(요3:5) 지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롬8:14)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받은 구원을 성령의 처음 열매라고 발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첫 열매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우리가 받은 현재의 구원을 성령의 첫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첫 열매를 "모든 수확의 시작이요 보증이 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전15:20절을 보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그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열매는 언제나 머지않아 완전한 추수가 뒤따를 것임을 확증하여 주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가 받은 현재의 구원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받은 현재의 구원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처럼 우리의 미래의 구원 역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현재의 구원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면 성령의 두 번째 열매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성령의 두 번째 열매란 뭘까요? 분문을 보면 양자가 되고 우리의 몸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23절) 여기서 양자가 된다는 말은 양자로서 완전한 상속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의 속량은 우리의 몸이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성령의 두 번째 열매란 우리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우리가 받을 미래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이 날을 얼마나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습니까?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에게는 그 사모함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에게는 그 사모함이 없을까요? 그것은 탁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안에 죄성으로 인한 탄식이 없을까요? 그것은 죄와의 투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의 구원을 고대하듯 하나님의 아들 된 우리 역시 탄식하며 죄와 투쟁하며 우리의 구원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 소망으로 구원을 얻음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24절)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소망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이 땅의 소망이고 잠시 후에 썩어질 소망입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은 하늘의 소망이고 썩어지지 않을 소망이고 내 영혼을 위한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소망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소망보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소망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왜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말할까요? 그것은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고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주목해야 된다고 말합니다.(고후4:18)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 가까이 보지 말고 멀리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만을 보지 말고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장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소망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소망보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소망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지 말고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멸리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며 인새을 살다 보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만 보며 인생을 살다 보면 인생이 미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는 것만을 보면 그것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만을 보면 고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인생의 전부가 보입니다. 비교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이 보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인생의 전부가 보입니다. 비교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이 보입니다. 썩어지지 않는 소망이 보입니다. 내 인생의 결말이 보입니다. 인생의 해답이 보입니다. 벧후1:9절에 보면 멀리 보지 못하는 자를 영적인 맹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영적 소경입니까? 영생과 그에 속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것들만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것만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멀리 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멀리 보는 자가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25절) 왜 멀리 보는 자가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까요? 장래에 나타날 그 영광을 알고 내 인생의 결말을 알고 내 인생의 해답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누가 멀리 볼 수 있는가?
첫째, 높은 곳에 있는 자
낮은 곳에 있는 자는 멀리 볼 수 없습니다. 땅에서 보면 땅의 것만 보이지만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면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 소망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누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를 수 있을까요? 힘이 있는 자입니다. 힘이 없으면 날개가 있다고 해도 높이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날개 치며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를 수 있는 그 힘을 공급받습니까? 여호와를 仰망하는 자입니다.(사40:31)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입니다.(합3:18~19)
둘째, 맑은 눈을 가진 자
가시거리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에도 가시거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맑은 영혼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바라봅니다. 고난을 받을 때도 현재의 고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나타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죄악의 미세먼지가 너무 많아 쌓여 있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영광의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맑은 영혼의 눈을 갖기 위해 날마다 어린양의 보혈로 죄악의 미세 먼지를 씻어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멀리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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