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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종수]안중근家의 두 아픔

꿈 꾸는 소년 2017. 8. 2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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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9 03:00: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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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종수]안중근家의 두 아픔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요즘의 대학은 도구적 지식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 가히 모든 종합대학을 이공대학으로 불러도 될 만큼 이공계의 비중이 크며, 연구와 교육도 현실의 유용성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연구비의 수주가 전공의 유용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간주되며, 인성 교육을 잘해야 한다는 말은 으레 가끔 하는 소리쯤 되어버렸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 안중근 관련 사료를 평생 모은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흥분했고, 그분을 찾았다. 안중근의 사상과 기백이라면 청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올바름에 대한 교육을 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분은 30년간 일본에 거주하며 안중근 사료를 추적하여 모았고, 그 모든 것을 어딘가 기증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1년 반에 걸친 논의 끝에 사료를 대학으로 기증받아 안중근 사료실을 열었다. 이틀에 걸쳐 사료를 옮길 때, 첫날은 일부러 이삿짐 용역을 전혀 쓰지 않았다. 학생들의 자원봉사를 유도하여 모든 사료를 나르고 정리했다. 힘이 들더라도 학생들이 사진과 책, 지도, 신문을 옮기면서 직접 무언가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여러 사람이 땀을 흘리고 수고를 해야 대학도 안 의사의 문패를 당당히 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공짜는 없었다. 사료실에 들어설 때마다, 거기서 만나는 사람은 ‘영웅’이 아니라 청년 안중근의 모습이었다. 동양평화와 박애 사상을 찾아 서류 한 장, 사진 한 장을 들출 때마다 거기서 느껴야 하는 것은 스무 살 청년의 아픔과 고뇌다. 그는 열여섯 살에 기울어 가는 나라를 보며 동학농민운동과 관군 사이에 끼어 전투를 해야 했다. 스물일곱 살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교육으로 사회를 일으키고자 삼흥학교를 세웠다. 그것으로 부족하자, 스물여덟에 의병에 뛰어들어 가족을 두고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를 거쳐 국내로 침투하여 일군(日軍)과 싸우다 대패하였다. 그러고는 1909년 의거.

사형을 당하기 전날 안중근은 정근, 공근 두 동생에게 유언을 남겼다. 맏아들 문생을 신부로 키워줄 것과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조국의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지만 맏아들 문생은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떤 어른이 준 과자를 먹고 갑자기 죽었고, 안 의사의 유해는 107년이 지난 지금도 어디 묻혔는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우리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하는 역사의 통증과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사료실을 만드는 과정에서 알게 된 바는 안중근가(家)는 지금도 두 가지 고통과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에 대한 친일 오명이다. 준생은 윤봉길 의거 직전 상하이를 탈출하지 못하여, 일제의 집중적인 협박과 공작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부친과 형을 잃고, 조국이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준생은 일제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총독부의 공작에 끌려 다녔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기치를 만나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허위 기사를 쏟아냈고 조선인들은 분개하였으나, 정작 집으로 온 준생은 아내에게 눈물을 흘리며 “내가 현해탄에 몸을 던졌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며 통곡했다고 유족들은 전한다.

다른 하나의 아픔은 가난이다. 안중근, 정근, 공근 세 형제의 혈족 중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유족은 안정근 선생의 며느님과 그의 두 딸이다. 사료를 모으고 정리하며 만난 이분들은 대쪽같이 살고 있었으나, 형언하기 어려운 가난과 씨름하고 있었다. 10여 평 임대아파트를 10번도 넘게 옮기며 병마와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학생들과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전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얼굴도 모르는 미국의 교포들도 마음을 보태 왔고, 동국대에 근무한다는 할머니 교수님도 힘을 보탰다.

기회가 되면 안준생의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도모하고, 유족들의 어려운 생활에 대해 마음을 다시 모으려 한다. 촛불도 좋고 태극기도 좋지만 우리가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면 이런 분들을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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