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2] 2008.

고통이 찾아올 때 / 주경훈 목사. 제30권 14호. 2018.04,08.

꿈 꾸는 소년 2019. 7. 5. 07:11

☞ <요 9:1~7>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선물을 받습니다. 그 선물 중에는 마음에 드는 선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선물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물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선물을 받으시겠습니까? 이 선물은 "고통"이란 선물입니다. 우리는 '고통은 선물이다'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듣고, 또 말하고 살아갑니다.

 고통에 대해서 신학적, 철학적 입장을 가장 잘 정리한 분 중에 C.S 루이스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고통이란 축복의 포장지이다"라고 했습니다. 축복을 고통이란 것이 감싸고 있다는 말입니다. C.S 루이스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상황을 통해서는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서는 말씀하지만, 고통을 통해서는 크게 외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확성기다." 고통만큼 공평한 것도 없습니다. 고통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고통의 후보자들이라면 이왕에 받은 고통을 잘 받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숙명론은 너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이니 견디라고 합니다. 

 반면 세속주의는 어떻게든 고통을 피하라고 자극합니다. 불교는 받아들이라고 하고, 숙명론은 견디라고 하고, 세속주의는 피하라고 한다면 성경은 고통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선물로 주어진 고통을 어떻게 받아야 하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알 수 없는 고통의 원인


  예수님께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주목하여 보고 계십니다. 1절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는 '에이덴'이란 헬라어로 능동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냥 보고 지나친 것이 아니라 주목하여 그 사람을 바라고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보시는 것 같으니 제자들이 묻습니다. 2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로 인함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의 수준과 관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결국 고통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이는 고통에 대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시각이었고, 또한 우리들의 시각입니다. 

 물론 고통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넓은 시각에서 고통은 죄가 원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이 전부 죄의 문제는 아님을 우는 또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 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욱 많습니다. 요나의 경우 사명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사울의 경우 다양한 죄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의 경우는 원인이 없습니다. 굳이 찾자면 너무 순결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통의 원인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고통의 결과에 대해서는 명확히 압니다. 고통에 대한 제자들의 시각이 아닌 예수님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 명확한 고통의 결과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고통의 원인이 아닌 고통의 결과에 주목하십니다. 고통을 일으킨 죄에 관한 논쟁이 아닌,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시각이 변화되면 한순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됩니다. 

 여러분의 고난이란 선물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과정을 보면 수수께끼 같지만 모순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인도하십니다.


 ♧ 고난 중 우리의 선택


  그렇다면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그리스도의 빛 아래 거하라.

 예수님께서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신 이후에 자신에 대한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5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생명의 빛이고 변화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평생 어둠 속에 있는 사라에게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맹인은 신체적인 어둠이 띄어지기 이전에 영적인 눈이 띄어졌습니다. 빛이 위대한 것은 빛은 아무리 작은 구멍이라도 틈만 있다면 그 틈을 뚫고 지나가 어둠을 몰아낸다는 것입니다. 빛을 막을 어둠은 없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면 우리의 모든 어둠은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빛 아래 거하시기 바랍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어둠 속에 있지 마시기 바랍다. 빛 아래 거하시기 바랍니다.

  2. 해결하는 삶을 포기하고 해결 받은 삶을 살라.

  맹인은 빛을 발견하자 스스로 인생을 해결하려고 했던 모습에서 해결 받기 위한 태도를 지닙니다. 삶의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습니다.

 이 맹인은 나의 이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낼 것이라는 말씀을 품습니다. 항상 모든 것의 출발은 말씀을 품은 것입니다.말씀은 변화의 시작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방법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셨습니다.(6절) 그리고 실로암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따릅니다. 실로암은 경사가 있는 곳입니다. 눈을 뜬 사람도 조심해서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따릅니다. 실로암은 경사가 있는 곳입니다. 눈을 뜬 사람도 조심해서 가야 합니다. 하지만 맹인은 더듬으며 그곳까지 순종하여 갑니다.

  셋째,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은 실로암에서 씻으면 눈이 떠질 것이란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맹인은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저 순종하는 마음으로 간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를 통한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며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순종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란 내가 원하는 결과가 주어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분만이 빛이기에 그 빛만 보며 걸어가면 됩니다. 고통이 찾아올 때, 우리는 고통의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결과는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 하실 일이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