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눅 24:25~35>
♤ 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도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깊은 실망과 좌절감에 자로 잡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 자신들에게 미칠지 모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제자들에 대해 누가는 그렇게 전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가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내려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여기에서 '그날'은 바로 '부활의 아침'을 뜻하는 것이고, '예루살렘'은 지난 며칠 동안 예수님 이야기로, 십자가의 보혈로 가득하던 바로 그 곳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모든 된 일'은 십자가 사건과 그날 아침에 들려왔던 부활 사건을 지칭합니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던 자리에 있었고, 그것을 직접보고, 듣고, 경험했습니다. 죽음은 끝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을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고향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절망의 자리에 한줄기 놀라운 희망의 빛이 비춰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그들, 처절한 패배감과 절망감에 몸부림치며 가고 있는 그들에게 다시 사신 주님께서 부활의 아침에 그들 가까이 찾아오셨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모르면 그것이 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축복을 모르면 그것이 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우리가 불쌍한 자이리로라."(고전 15:17,19)
그러나 무덤의 권세를 깨치시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다면 믿음도 헛되지 않고 우리는 죄 가운데서 구워을 받는 것이면 끝난 것 같으니 결코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삶의 아름이 있고 암담해도 한 가지 확신만 있다면 이길 수 있는 것이 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목숨을 위협하는 핍박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 한 가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입니까? "주님은 살아계신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그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소식이 들려와도 이 철저한 인식의 차단, 철저한 무반응성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은 그들과 함께 가시지만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합다. "그들의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지경이 된 것입니까? 그들의 문제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는 좌절감 때문이었습니다. 부활 소식을 들었으나 그들은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힘든 인생길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삶은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합니다.
여기서 신앙인의 불신앙과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믿음의 삶이 이깁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에게 그러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가고 계셨습니다. 버리시기에 아깝지 않은 제자들이지만 주님은 그들과 함께 진종일 걸어가십니다. 주님은 알아지 못해도, 오히려 자기 주장만 펼치고 있는 그들의 한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진종일 걸어가십니다.
그들의 고민과 아픔의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그들의 한숨과 눈물의 호소를 들어주십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 더떻게 회복하는가 - 엠마오의 예배
그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그렇게 송두리째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믿음을 회복하고, 부활 신앙의 증거자들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이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은 한 점 틀림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십니다. 진종일 말씀을 설명하십니다. 제자들이 그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었습니다. 숙소에 들어가 저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상의 식사를 거룩한 성찬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 장면을 누가는 선명한 특징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진종일 걸어가시면서 말씀을 들려주시고, 저녁 식탁에 함께 앉으신 주님께서는 "떡을 드시고(take the bread). 그 떡을 축사하시고(bless the bread)"고 기록합니다.
유명한 예배학자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는 이것은 "성찬의 행동들"(Actions of the Eucharist)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 영의 눈이 닫혀진 제자들을 예배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곗계십니다. 아무런 기대 없이 참석했던 예배였디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친히 배설하시는 성찬에 참석하신 중에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들의 어두웠던 눈은 열려지면서 놀라운 주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영적으로 어두워져 절망 가운데 삶을 살던 사람들이 엠마오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고, 주님이 친히 나누어주신 성찬을 받으면서 그들의 영의 눈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오늘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길 빕니다. 예배 가운데 참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오늘도 우리의 삶에 누길 떼지ㅣ 아니하시고 계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관심을 새롭게 발견하는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못 자국 난 손으로 오늘도 우리의 아픈 가슴을 쓰다듬고 계시고, 절망하고 있는 삶을 터치하고 계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예배여야 합니다.
♤ 부활의 전복성, 그리고 증언자들
오늘 엠마오 도상에 서 있는 사람들의 삶은 아픕니다.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나 다시 사신 주님을 만가고 나니, 그분의 손을 잡고 나니 절망의 저라 엠마오의 도상은 바뀝니다. 남편을 땅에 묻고 돌아온 자리도 천국을 소망하는 자리가 됩니다. 하늘의 평강을 기원하는 자리로 바뀝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국의 성서신학자 톰 라이트는 "복음의 전복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책.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모든 것을 전복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전복시킵니다. 기존의 유대인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세계관을 전복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통념적인 이야기 세계를 전복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부활의 복음은 모든 것을 전복시킵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한숨을 찬송으로, 눈물을 소망으로 전복시킵니다.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으로 전복시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 가운데 떨고 있던 엠마오의 두 제자를 전복시키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경험하고 부활의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 믿음으로 가지고 나아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바꾸는 복음의 전복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가 드릴 기도는 그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모든 것을 거두어 버렸던 무덤 문이 활짝 열렸듯 주여 우리 눈도 열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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