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옛 텃밭에 들러 - 박영석 [전우회 대구경북지회. 제188호. 2020.3.15]

꿈 꾸는 소년 2020. 12. 21. 09:52

立春을 앞둔 어느 날

지금은 남의 땅으로 넘어간

토평리 텃밭에 가 보았다.

作別하듯 虛虛로운 마음으로

왠지 모를 발길에 이끌려

옛 텃밭에 닿았다.

☞ 허허롭다 : ① 느낌이 있다. ② 매우 허전한 느낌이 있다

 

농사철 내내 시름했던 잡초들이

至賤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죽은 듯 매운 계절을 견디고 있었고

그중에는 겨울냉이도 더러 보였다.

잠다던 味覺이 떠울라

언 땅을 헤집고 냉이 명 포기를 採取했다.

그 냉이 한 움큼에서 피어나는

生命의 香氣가 新鮮하다.

☞ 지천 : ① 느낌이 있다. ② 매우 흔함. 

☞ 헤집다 : ① 긁어 파서 뒤집어 흩다. ② 이리저리 젖히거나 뒤적이다. ③ 걸리는 것을 이리저리 물리치다.

 

 

비록 無意識의 잡초일지라도

얼어 죽지 않으려고

땅 속으로만 뿌리를 길게 내려서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始原이

證票(증명이나 증거가 만한 )처럼 시퍼렇다.

☞ 시원 : 사물, 현상 따위가 시작되는 처음. 

 

지금은 남의 땅이 된 텃밭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

지난 십여 년 초보 농사꾼이 되어

비켜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쌓인

자잘한 기억들을 떠올린다.

 

세월의 주름살 속에

켜켜이 묻혀 잊혀진 것들이

아주 사라진 줄 알았는데

至毒한 생채기들은 결코 지워지는 것이 아님을

이제야 알게 된다.

 

이지러운 세상에 마음 둘 곳을 찾다가

노년의 무거운 첫 짐을 내려놓았던

여린 농심마저도

이제는 마감이 저절로 다가왔다.

누가 말했었지?

빈 마음오르 텃밭에 살리라고.

 

저녁 어스름 산촌 마을에

밥 짓는 연기가 산자락에 걸린 듯

지난 세월 속 편린들이 스머스멀 기어나와

머릿속은 과거 속으로 내달린다.

 

흔들리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삶의 고비들을 되돌아보며

회한 같은 외길을 용케도 잘 견뎌왔지.

그래

길이 아닌 길을 걸을 수는 없었지.

 

텅 빈 겨울 텃밭에 홀로 서서

살아온 날들이 만들어준 애잔함에

마음이 가랑비처럼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