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당신의 마음을 制馭하라<2011.10.9 / 제23권 41호>

꿈 꾸는 소년 2011. 10. 9. 15:55

☞ <잠 25:16~17, 27~28>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에 엑셀러에이터와 브레이크가 있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앞만 보며 다려가는 熱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브레이크를 밟은 것도 중요합니다.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인생에는 절제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절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절제란 무엇입니까? 사전에 절제란? '정도에 넘지 아니하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절제란 한 마디로 자기 조절 능력입니다. 그래서 NIV 영어 성경헤서는 절제를 "자제(self-control)"번역하기도 합니다. 절제란 자기를 알맞게 조절하는 능력, 자기를 알맞게 統制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 快樂은 절제가 필요하다

 

 오늘 본문은 가장 먼저 쾌락의 절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고 말합니다(16절). 왜냐하면 과식함으로 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오는 꿀은 즐거움과 쾌락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꿀을 즐거움과 쾌락을 상징하는 것으로 봅니까? 그것은 꿀이 달꼼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은 달콤합니다. 쾌락이 쓰다면 누가 쾌락을 위해 살겠습니까? 쾌락의 열매는 쓸수 있지만 쾌락은 달콤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 순간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것입니다. 쾌락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즐거움과 쾌락 그 자체도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지만 쾌락주이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쾌락을 더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즐거움과 쾌락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알맞은 자기 절제가 필요합니다. 왜 절제가 필요합니까? 지나치게 즐거움과 쾌락을 耽溺하게 되면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 이웃집에 너무 자주 가지 말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17절은 이웃집에 너무 자주 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마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17절)" 한 마디로 이웃집을 너무 자주 방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벗이라 할지라도 너무 자기 집 드나들 듯이 방문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아야 합니까?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무례하게 행하거나 민폐를 끼치면 싫어하는 마음이 들 수 있고 더 나아가면 미워하는 마음까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계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 名譽를 貪하지 말라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榮譽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27절)" 여기서 꿀은 영예를 말합니다. 그래서 꿀을 많이 먹는 것을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꿀이 아무리 우리의 몸에 좋다고 해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좋지 못하듯이, 지나친 영예 욕에 사로잡히면 그것도 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명예와 榮光은 貴重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귀중한 명예와 영예도 집착하게 되면 아니 명예를 위해서 불의와 타협하게 되면 명예대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라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城邑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28절)" 왜 자기의 마음을 제어해야 합니까?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면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벽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들의 성읍을 방어해 주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읍에는 성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벽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침략자에게 성을 내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는 선한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 안에는 추하고 악하고 더러운 것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끝없는 욕망과 미움, 분노, 그리고 貪慾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순간순간 내 마음에 일어나는 욕망과 미움 그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는 성벽이 무너진 성읍처럼 대적의 도전 앞에 束手無策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둠의 영에 의해 공격을 받고 무너진 성읍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기 위해 해가 지도록 憤을 품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쌓은 인생의 성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아니 내 가정을 지키고 쌓아 놓은 인생의 업적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오직 성령으로

 

 그런데 문제는 내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征服하고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분노를 조절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그런데 墮落한 우리의 마음은 내 마음을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채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알면서도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며 욕망의 지배를 따라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保惠師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셨습니다. 왜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셨습니까?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서 입니다(롬8:26). 우리는 아무리 인격이 高尙하고 훌륭해도 내 안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분노를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타오르는 肉身의 慾望을 이겨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면 내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8:13에서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 갈 때 욕심을 죽일 수 있고 순간순간 타오르는 미움과 분노의 감정도 억누를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充滿은 내 마음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 節制는 성령의 열매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23).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맺어지는 열매를 말합니다. 그런데 절제의 열매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절제의 열매가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다른 열매에 비해 중요하지 않아서 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절제가 모든 열매를 더욱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다른 열매를 담는 바구니와 같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다른 열매들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또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절제의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