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상 4:1~1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언약궤를 빼앗기다]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불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2.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戰列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3.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구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야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거기에 있었떠라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며 땅이 울린지라 6.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 지라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자기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부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 블레셋의 侵略과 이스라엘의 敗北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였습니다(2절). 그러면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까요? 단순히 領土의 擴張을 위해서 일까요?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어느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이 列邦 중에서 택하여 자기 백성 삼으신 특별한 선민 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방족속으로 이스라엘을 侵功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犯罪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주변 이방 나라들로부터 침공을 받을 때에는 언제나 偶像을 崇拜하고 도덕적으로 墮落하였을 때입니다.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敬畏할 때 이방나라로부터 침공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침공을 받아 전쟁에서 패배를 하였습니다.
□ 하나님을 怨望하다
이스라엘의 병사들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돌아오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곧 바로 전략회의를 가졌습니다. "백성이 陣營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3절a).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패하게 하셨는가?"라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패배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吐露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우러 나가면서 한번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패배하니까 하나님께서 패하게 하셨다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우리들도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께 묻지도 않습니다. 성공할 것 같고 돈이 될 것 같고 분위기도 좋고 아이템도 좋고 전략도 좋으니까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에 옯깁니다. 그러다 실패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기 스스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실패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왜 실패하였는지 실패의 이유를 찾아보지도 않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잠19:3).
□ 작은 실패가 큰 성공이 되게 하라
하나님이 사람은 작은 실패를 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이 작은 실패를 통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더 큰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해 이번에는3만 명이나 목숨을 잃은 더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은 실패를 통해 우리가 더 큰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작을 실패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실패의 이유를 온전히 깨닫고 그래서 더 큰 승리, 더 큰 성공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실제로 우리들 주변을 보면 작은 실패로 인하여 더 큰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은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패배로 인하여 공동체에서 죄를 제거하였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乘勝長驅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실패를 거울삼아 더 큰 승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는 작은 실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찢고 겸손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작은 실패가 더 큰 성공, 더 큰 승리가 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작은 실패가 큰 실패가 될 수도 있지만 작은 실패가 더 큰 성공을 가져다 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 言約櫃
전략회의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패배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자고 말했습니다(3절). 언약궤는 하나님의 臨在를 상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언약궤를 들여다 보는 자도 죽었고 만지는 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을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장로들은 언약궤를 가져오기로 결정을 하였을까요? 예전에 모세가 이 언약궤가 지나가는 곳에 대적들을 흩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민10:35). 뿐만 아니라 언약궤를 메고 나아갔을 때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 났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에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병사들은 땅이 진동할 정도로 승리의 喊聲을 외쳤습니다(5절). 반면에 블레셋 병사들은 "우리에게 화로다"며 두려워 떨기 시작하였습니다.(7~8절). 그런데 놀랍게도 전쟁은 이스라엘으 慘敗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3만 명이 목숨을 잃고 하나님의 언약궤 마저 빼앗기고 에리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 敎訓
첫째로, 기독교적 상징물들을 우상화해서는 안된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들여다 본자도 죽었고 떨어지려고 할 때 만진 자도 죽었습니다. 하지만 상징과 실제를 混同해서는 안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지금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상징물이 바로 언약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상징물인 언약궤는 神聖視하고 우상처럼 崇拜하면서도 실재이신 하나님은 경외하지 않고 依支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신앙과 敬畏의 대상이지 이용의 대상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과 경외의 대상인 하나님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전쟁에 끌여 들여 승리하고 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보다 철저하게 언약궤를 이용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언약궤를 전쟁의 守護神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언약궤를 마치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符籍(부적)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전쟁터에까지 가지고 온 것은 신앙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전쟁에 이기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가져온 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신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巫俗 신앙입니다. 신앙과 미신이 어떻게 다른지 아십니까?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미신적 신앙은 내 자신이 복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샤머니즘의 중심에는 언제나 내 자신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당신의 삶에 이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敬拜의 대상이지 이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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