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그리스도인이여, 野性을 가지라! <2011.9.18 / 제23권 38호>

꿈 꾸는 소년 2011. 10. 5. 17:25

☞ 렘 <1:8 ~ 10>

 

 □ 사라진 야성

 

 사람들이 던져 주는 먹이 때문에 짐승들이 가지고 있는 야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성이 사라진 동물들은 편리함에 익숙해져서 홀로 서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광객이 찾아오지 않는다든지 오랫동안 폭설이 내리면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悲慘하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생태계의 保全과 질서를 위해서라도 야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보면 동물이든 자연이든 야성을 잃을 때 불행해집니다. 이렇게 자연과 야생 동물에게 야성이 필요하듯 하나님이 사람에게도 야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야성이 있어야 하나님이 맡겨준 사명을 제대로 堪當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야성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생활이 潤澤해지고 경제적인 여건이 좋아지면서 세상이 주는 달콤한 그 魅力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야성을 일허만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야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영적 전쟁의 현장에 하나님의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골리앗이 세상의 文化라는 갑옷을 입고 세상의 知識이라는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이름을 冒瀆하고 교회를 非難하여도 다윗처럼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反面에 非理 사건이 터졌다 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야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는 장면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실 때에 '나는 나이도 어리고  말도 잘 못합지다'라며 슬퍼했습니다(5절). 나이도 어리고 말도 잘 못하였지만 沒落한 제사장의 後裔라는 것, 실패한 제사장의 아들이라는 劣等感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반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결코 아이가 아니다. 너는 내가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서 무엇을 명령하든지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를실 때 야성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온실 속의 하나님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어 당당하게 나아가 외칠 수 있는 야성적인 선지자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나이, 단점, 열들감 때문에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예레미야에게 "두려워하지 말라(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예레미야가 부르심 앞에서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두려워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도(창15:1), 야곱도(창46:3), 여호수와도(수1:9), 기드온(삿6:23)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두려움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온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딤후1:8). 뿐만 아니라 두려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영적 전쟁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를 선발할 때 "두려워 떠는 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두려움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질 때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믿음이 있을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주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안에 居處를 정하시고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믿음이 있을 때 두려움을 이겨내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야성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무엘의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어서 친히 손을 내밀어 그의 입에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왜 하나님은 친히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면서 말씀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刻印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둘째, 입술을 淨潔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 "내가 말을 네 입에 두었다"는 것은 너는 이제 가서 내가 너에게 준 말씀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네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말하지 말고 내가 너에게 준 메시지만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設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때로는 심판의 메시지가 아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 심판의 구원

 

  10절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가 선지자로서 선포해야 할 말씀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여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10절)"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이런 단어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건설하여 심게 한다"는 말씀은 회복과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뽑고 파괴하고 넘어뜨리고 건설하여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레미야의 입술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들을 심판하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동네에 사는 제사장이 아들, 말도 잘못하는 20대 초반의 청년 한 사람을 세워서 여러 나라를 쥐었다 폈다 하는 일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레미야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그의 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꼐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입술에 있었기에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정말 야성을 가진 선지자로서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끓지 않고 숨어 지내는 칠 천명의 사람보다 엘리야 처럼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와 싸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문화와 어둠의 세력에 의해 정복 당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해 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물맷돌로 세상의 골리앗을 무너 뜨리고 믿음의 喊聲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