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 13:12 ~ 16>
□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던 히브리서의 유대 기독교인들
구약에는 성전 제사란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臨在(presende)를 경험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기독교에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 예배에는 성전도 없고, 제사의식도 없고, 제사의식을 執典하는 제사장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교의 성전제사에 익숙해 있었던 히브리서의 유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예배를 시시하게 느끼고, 그럴 듯한 종교의식을 갖춘 유대교로 다시 돌아 가려고 했던 것 같니다.
□ 영문 밖 그에게로 가자
그들을 향해서 13절은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합니다.13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 문맥을 파악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바쳐진 제물은 제사장이 먹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바쳐진 속죄제물의 겨우는 달랐습니다. 피는 성소로 가져가고 짐승의 사체는 영문 밖에서 불태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대속죄일의 이 제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12절과 13절에 나온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유대인들에게 있어 "영문 밖"은 부정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성문 안으로 들어올 때는 정결의식이 필요했습니다. 즉, 영문 밖은 부정한 것, 汚染된 곳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있어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苦難 당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發想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영문 밖 부정한 곳에서 고난당하심으로 자신을 부정한 세상과 동일시 하신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부정한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에 거룩하지 않았던 곳을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영문 밖은 십자가 빛 속에서 이해되는 세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전에 영문 밖 세상은 부정한 곳, 죄로 인해 오염된 곳,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기다려지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부정했던 세상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는 장소,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는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디 위해 나가신 "영문 밖 세상" 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단순히 영운 밖으로 나가자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가자"고 말합니다. 세상이 소망을 니닐 수 있게 된 것은 그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은 여전히 부정한 영역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 한 가운데 계심으로 한 가운데 계심으로 과거에 부정했던 곳이 거룩한 곳으로 바뀝니다. 절망의 장소가 소망의 장소로 변합니다. 슬픔의 장소가 歡喜와 기쁨의 장소로 바뀔 수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의 삶이, 우리의 가정이 부정한 장소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제 거룩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 그의 凌辱을 짊어지고 나가자
그런데 동시에 영문 밖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능욕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셨다면, 신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 그에게로 나아가지 앉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존경스러워 보이는 예루살렘 성문 안의 생활에 安住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사역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난의 삶을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자 자세가 없으면, 세상은 거룩한 영역으로 변화딜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십자가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들이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되는 없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종교적인 방어막 안에 안주하려고 하지 말고 방어막을 뛰쳐나와 세상 한 가운데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발로 이런 야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변화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어덯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삶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제사를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성전 안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입니다. 따라서 제사의 형태도 변화됩니다. 변화된 제사의 형태를 15~16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드려야 할 첫 번째 제사는 "찬미의 제사"입니다. 전에 우리는 형제를 모함하고 욕하고 더러운 말을 쏟아내던 부정한 입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듭난 신자들로 입술의 변화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찬양의 생활을 새로운 영적 재사라고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드려야할 두 번째 제사는 "善行의 제사"입니다. 전에 우리는 온갖 악을 행하고 범죄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난 뒤에 거룩한 존재들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선행의 삶을 또 다른 영적 제사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 나와 드리는 주일 예배만 예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다 하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천국 생활을 매일 나의 입술의 찬송을 통해서 그리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선을 베푸는 삶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다 이러한 축복에 동참하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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