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조성하]메리 크리스마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이런 이들이 내겐 이렇게 다가온다. 사계절 외에 또 하나의 계절을 안고 사는 것으로. 한 달 전부터 달구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산중의 밴프나 대도시 밴쿠버도 다르지 않다. 밴쿠버의 트리니티가(街)에서는 매년 전등장식 집 선발대회를 연다. 그 환상적인 장식에서 열정이 전해진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우울한 겨울을 즐겁게 보내려는 지혜의 소산이라 이해된다.
유럽도 같다. 어느 나라건 도시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선다. 주로 시청 마당과 철도역 등 공공장소를 이용하는데 이 노천임시시장은 온종일 열린다. 하지만 법석대는 시장의 제 모습은 해지고 난 뒤에 비로소 펼쳐진다. 퇴근한 시민들은 아이들 손을 잡고 나와 노점을 기웃거리며 선물을 고른다. 아이들은 군밤이며 꿀을 발라 구운 땅콩 등 군것질거리를 들고, 어른들은 삼삼오오 시장통에 선 채로 컵에 따른 글루바인(뜨겁게 데워 마시는 와인)을 홀짝대며 담소한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인상적이었다. 매년 시청 안의 눈 덮인 공원에 들어서는데 매일 저녁 북적댔다. 눈밭에선 말이 끄는 썰매가 달렸고 그 옆에는 나무로 지은 작고 예쁜 크리스마스 우체국이 세워졌다. 마켓에서 카드를 사 여기서 써서 부치라고 마련한 것이다. 이즈음 시청사는 한밤에도 열어둔다. 선물을 직접 만들려는 시민을 위한 공방이 늦게까지 문을 열어서다. 고풍스러운 청사 2, 3층 전면의 유리창은 매일 한 칸씩 커튼으로 가린다. 밝혀진 방의 창문 수로 크리스마스까지 남은 날수를 알리는 것이다.
캐나다 취재를 마치고 귀국한 건 지난주초. 이튿날 서울 도심의 한밤 퇴근길에서 나는 허전함과 황량함에 의기소침해졌다. 분명 크리스마스 시즌인데도 캐럴은커녕 시청 앞에 세운 크기만 큰 트리 하나 외엔 별 장식도 없던 무표정한 거리 모습 때문이었다. 길거리에서, 혹은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캐럴을 들은 게 언젠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질 않지만 우리가 왜 이리 무미건조해졌는지는 애써 묻지 않을 테다. 자영업자의 가계대출이 100조 원을 넘겼고 빚진 가구의 평균부채가 8000만 원을 웃돌며 가처분소득보다 금융부채가 더 많은(109.6%·2011년 가계금융조사) 현실의 주인공이 나란 걸 잘 알아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일을 가장 많이(연간 2074시간)하면서도 갚을 돈이 쓸 돈보다 많은 우리. 그러니 크리스마스트리나 장식을 설치하거나 둘러볼 여유가 없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낼모레는 크리스마스이브이고 예수 탄생이 주는 메시지는 ‘희망’이다. 그러니 다시 중산층으로 복귀할 그날이 반드시 올 걸로 믿으며 자신을 향해 이렇게 한 번 외쳐보자. ‘메리 크리스마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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