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 3:19~23> 내 苦楚와 災難 곧 쑥과 膽汁(쓸개즙)을 기억하소서 20.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여호와의 인자와 矜恤이 無窮하시므로 우리가 殄滅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誠實하심이 크시도소이다.
□ 내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통을 싫어합니다. 할수만 있다면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고통이 없는 가정,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며, 고통 속에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기억해달라며 呼訴하고 있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19절)"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잿더미가 되고, 성전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러간 것을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쑥이 얼마나 씁니까? 그런데 짐승의 쓸개인 담즙은 더 씁니다. 그래서 고사성어를 보면 원수를 갚기 위해 인내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臥薪嘗膽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와신상담이란 '땔나무 위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조국과 자신이 처하여 있는 상황이 얼마나 悽絶하고 고통스러웠으면 쑥과 담즙으로 표현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고난과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나의 이런 고통을 기억해 달라고 말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라고 호소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자신이 처해 있는 고난과 고통스러운 상황을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호소하는 자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쑥과 담즘과 같은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일어설 힘도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도 끊어져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를 찾아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호소해야 할까요?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 내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우리의 고통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해야 합니다. 세상은 안된다고 말하고, 사탄은 이제 끝장이라고 말해도 하나님의 사람은 예레미야와 한나처럼 자신의 슬픔, 자신의 아품, 자신의 고통과 탄식을 그대로 가지고 나아와 하나님께 호소해야 합니다.
□ 예레미야의 낙심
20절을 보면 예레미야의 낙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나의 고난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이 낙심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20절).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에게도 낙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외쳤던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낙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외쳤던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낙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무엇을 인하여 낙심이 되었습니까?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지나간 상처를 자꾸 기억하고 마음에 남겨두면 상처만 더욱 커집니다. 지난날의 아픔과 고통을 자꾸 기억하면 더욱 낙심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만 있으면 지난날의 아픔을 기억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라"고 말씀합니다.
□ 고통 중에 소망을 발견함
그런데 예레미야는 모든 소망이 끊어진 그 상황 속에서 "오히려 그것이 나의 소망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21절). 그러면 여기서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절망, 고통, 아픔, 상처, 탄식, 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절망과 탄식과 아픔과 상처가 도리어 소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절망과 탄식과 아픔이 소망이 되었을까요? 이것을 내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은 "내가 고통 중에 내 마음을 돌이켜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소망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넋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아픔과 고통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모든 소망이 끊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라"고 고백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절망이 사라지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낙심이 되었는데 하나님을 묵상했더니 새로운 힘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 중에 소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고난 중에 절망하며 넋을 잃고 않아 있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소망이 끊어진 상황 가운데서도 의지적으로 말씀을 끌어 올려 묵상하며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소망을 얻은 자입니다. 고통 중에 소망을 발견하는 자입니다.
□ 고통 중에 깨달은 소망은?
그러면 예레미야가 고난과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말씀을 묵상함으로 깨달은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22절)" 예레미야가 고통 속에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발견한 소망은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인자란 히브리어로 "헷세드"를 말합니다. 헷세드라는 말은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헷세드는 모든 조건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사람의 이해득실을 초월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헷세드입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 영어로는 "mercy"라고 하는데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자에게 저주를 중단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행동으로 접근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비록 우리가 징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측은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무궁하시기 때문에 결코 진멸되지 않을 것을 믿었습니다.
□ 주의 성실하심
예레미야가 쑥과 담즙과 같은 고통 속에서 깨달은 또 하나의 소망은 주의 성실하심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23절)" 여기서 이것들을 바로 앞서 말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다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지쳐있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아침에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순간순간 새롭게 다가올 뿐만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새로운 방법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일관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실함이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예레미야는 고통의 아픔 속에서, 절망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묵상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고통과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주의 성실하심을 묵상함으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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