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 3:32~33> 그가 비록 근심하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다.
우리 말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의 마음, 본심을 알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본심이 아닌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에게도 숨겨진 본심이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절)"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생과 근심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도덕적 부패로 인하여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성벽이 무너졌고 예루살렘이 황폐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有能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두 눈이 뽑힌 채로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전쟁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자들의 悲通함을 아십니까? 사랑하는 조국과 무너진 성전과 가족들을 멀리한 채 기약도 없이 포로로 끌려가는 자들의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웠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들이 당하는 그 고통과 괴로움과 근심이 내 본심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본심은?
첫째로, 仁慈와 矜恤입니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32절)" 하나님의 본심은 인자와 긍휼입니다. 인자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헷세드'라는 단어입니다.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언약을 맺은 관계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언약을 맺은 관계에 있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고, 軟弱하고 넘어져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 사랑이 바로 인자입니다. 긍휼은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기시고 惻隱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징계를 받아 고통 중에 몸부림칠 때 더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그래도 싸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고통과 근심이 아니라 인자와 긍휼입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게를 묵상하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12살에 왕이 되어 55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나라를 다스렸던 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아버기가 헐어버린 신당을 다시 세우고,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의 제닫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자입니다. 성경을 보면 므낫세는 역대 왕 중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군대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게 되자, 그리고 많은 患難을 당하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겸손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이렇게 회개하고 돌이키자 므낫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사 왕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환난 주에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고 당신의 얼굴을 구할 때 다시 회복의 은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와 긍휼입니다(대하33장).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고통과 근심이 아니라 인자와 긍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시면서도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둘째로, 편안과 미래와 희망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하나님의 생각을 재앙이 아닙니다. 불안이 아닙니다. 불행이 아닙니다. 비극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지금 그들은 우상을 崇拜하고 회개치 아니한 까닭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왔습니다. 앞으로도 돌아가려면 70년이라는 세월이 차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졌고, 하나님의 성전은 불타 버렸고, 예루살렘의 거리는 荒蕪케 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강국인 바벨론은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습니다. 조국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포로된 자신들을 돌아볼 때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비록 징계 가운데 있을지라도, 포로된 가운데 있을지라도, 暗澹한 현실 가운데 있을지라도 평안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평안입니다. 왜냐하면 평안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미래와 희망입니다. 희망은 우리의 미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인하여 그것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신앙이 바로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데 될지 모르는 그 암담한 현실 속에 사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꿈과 비전입니다.
셋째로,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징계가 아닙니다. 고생이 아닙니다. 징계와 고생을 통한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 계실 때 헬라인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여인이 귀신들려 고통 받는 어린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질 않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니 개들이나 마찬가지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주님의 본심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본심은 "너는 너의 자존심이 그렇게 상해도 나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우리를 흔드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훈련하실 때가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단단한 쇠는 두드려서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살다보면 하나님의 우리의 삶을 송두리 채 두드리고 흔드실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흔드셨습니다. 그렇게 25년을 흔드신 다음 약속대로 아들을 주셨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으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13년 동안 흔드신 다음 그 꿈대로 지도자가 되게 하셨고, 모세는 무려 80년 동안 흔드신 다음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푸른 풀밭,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전에 반드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위대한 축복의 역사를 이루시기 전에 우리의 삶을 성두리째 흔드십니다.
경험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흔드실 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사망의 陰沈한 골짜기를 거닐 때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흔드심은 하나님의 훈련은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흔드심의 목적은 고난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마음이 아픈 것처럼 우리 하나님 역시 마음이 아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저주와 징계가 아닙니다. 고난과 근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인자와 긍휼이며, 미래와 희망입니다.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한마디로 행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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