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118:28~29>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29.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파스칼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과 無關한 인생' '하나님을 探究하는 인생' '하나님을 信仰하는 인생'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을 '어리석은 자'로 '하나님을 탐구하는 인생'을 '불행한 자'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생을 '행복한 자'로 분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을 행복한 자라고 말합니다(시32:1,신33:29).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돈과 권력과 환경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광야의 인생길을 걷는 우리도 행복한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행복한 자로 살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의 사람으로 살아갈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 잊어버림의 은혜와 잊지 못함의 은혜
특별히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 가운데 베푸어주신 두 가지 은혜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은혜는 무엇입니까? 바로 잊어버림의 은혜와 잊지 않음의 은혜입니다. 요셉의 두 아들을 낳고 장자의 이름을 '무낫세',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으로 지었습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은 '잊어버림'이라는 뜻입니다(창41:51). 요셉은 누구보다도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누구보가 깊은 마음과 아픔과 상처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아픔과 억울함과 상처와 고통을 잊어버리게 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잊어버림의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는 바로 잊어버림의 은혜입니다.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의 뜻은 '昌盛(기세가 크게 일어나 잘 뻗어 나가다)함'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둘째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繁(번성.많다.무성,복잡.번거롭다)盛(성하다.성대.두텁다. -한창 성하게 일어나 퍼짐. 나무나 풀이 무성함)예 하셨다(창41:52)"고 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번창케 하셨고, 하나님이 나를 국무총리로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으로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 잊어버림과 잊지 않음의 은혜가 있었기에 요셉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을 우리에게도 잊어버림의 은혜, 잊지 않음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118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인 다윗이 고통 속에서도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은 지금 고통 중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습니다(5절). 다윗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에 의해 겹겹이 에워싸임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7절, 10~11). 아니,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밀쳐 넘어뜨리려는 자들에 의해 둘러 싸여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13절). 그런데 다윗은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28절a)"라고 고백합니다. 19절에서도 보면 다윗은 의의 문들을 열라 그러면 내가 그리고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21절에서도 "주꼐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기에 내가 주께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감사란 타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응답받고 구원받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원수들이 자신을 겹겹이 에워싸고 자신을 미워하며 벌떼처럼 자신을 공격할 때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주께 감사했습니다.
성경을 보거나 인류 역사를 보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감사했던 사람들입니다.
□ 감사의 이유
첫째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28절)" 성경을 보면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말할 때 "나의 하나님"으로 표현했습니다. 본문 14절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14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말할 때 나의 하나님으로 표했습니다(시23:1,27:1. 삼하22:2~3). 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오랜 세월 사울 왕에 의해 쫓겨 다니면서,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시고, 요새이시고, 방패이시고, 피난처이시고, 구원의 뿔이시며, 내 생명의 능력이시며, 나의 목자가 되심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만나고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시기에 다윗은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my God)"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만나고 내가 경험해야 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때에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하나님은 의미가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仁(어질다.자애롭다.인자.사랑)慈(사랑.어머니.자비-마음이 어질고 자애롭다)하심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9절, 1절) 다윗은 그런 고통스러운 상항 속에서도 하나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인하여 여호와께 감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선하고 악합니다. 인간은 편리에 따라 선하기도 하고, 이익에 따라 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선하신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가장 선하고 좋은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편 118편에 보면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1~4절, 29절까지 5번 나옵니다. 안자하심이 무엇입니까? 헷세드, 다시 말해 언약적 사랑입니다. 언약을 맺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언액을 맺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언약적 사랑이기에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 실패함이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헷세드를 아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실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자를 아는 자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왜 오늘 우리가 주께 감사해야 합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그런데 다윗은 내가 주께 감사하는 것과 내가 주를 높이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28절)" 무슨 말입니까? 내가 주께 감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높이는 최상의 경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시편 50편 23절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최상의 경배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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