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p1019).
□ 확인 받고 싶은 사랑
모든 사람들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확인 받길 원합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어린 자녀들에게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라고 묻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현장에서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묻고 싶은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임종의 순간에 가장 많이 오고 가는 말이 바로 사랑합니다. 떠나는 사람도 "사랑했다"라고 말하고, 떠나보내는 사람도 "여보 사랑해, 그동안 고마웠어요", "아빠 사랑해요. 그동안 저를 이렇게 잘 키워줘서 너무 고마워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描寫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2: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기에 하나님 역시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신부된 우리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확인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觀念이 아닙니다. 사랑은 哲學이 아닙니다. 詭辯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確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아들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확증해 보이셨습니다(롬5:8). 종이 울려야 종이 될 수 있고, 장작도 타오를 때 불이 되는 것처럼, 사랑도 확증될 때에만 사랑일 수 있는 것입니다.
□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 하리니(4절b)"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하나님은 1인칭 단수 대명사를 사용하여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요한일서4:10). 사랑의 관계에서는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동등한 조건과 만남, 그 관계 속에서는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 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있는 관계에서는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도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영원한 사랑이 될 수 없고, 조건적인 사랑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처럼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러므로 이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영원합니다.
□ 내어줌의 사랑
그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어줌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생명을 건지시기 위하여 여러 민족들을 희생케 하셨음을 말합니다. 3절에서도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을 속량물로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애굽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항상 애굽을 의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 애굽이라는 큰 나라를 속량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구원과 해방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루어야 할 값이 있었는데 애굽이라는 나라를 값으로 지불하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 볼품도 없고 허물도 많고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십니까?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아니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요3:16,롬8:32).
□ 생명을 대신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대신 주신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 하리니(4절b)"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 값이 지불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임을 당해야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를 보면 얼마나 수 없이 많은 짐승들이 죽어야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구약이 제사를 보면 제물을 잡아 제단에 올리기 전에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였습니다(레3:2). 왜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까? 죄의 轉嫁를 위해서 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네가 내 대신 나의 죄를 뒤집어쓰고 내 대신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을 통하여서만이 죄 값이 지불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없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사람이 목숨을 건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것과 같습니다. 생명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사실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아들보다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 사랑의 代價를 支佛하라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수고"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복음과 율법과 철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이 이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랑하라' 이것은 율법이고,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철학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기에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복음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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