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칼럼

[김정운의 남자에게] 새벽에 자꾸 깬다![한겨레]

꿈 꾸는 소년 2010. 9. 16. 10:14
언젠가부터 새벽에 자꾸 깬다. 특별히 걱정되는 일도 없는데, 한번 깬 잠을 다시 이룰 수가 없다. 예전에 이런 일은 없었다. 다시 잠을 이루려고 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 온다. 이럴 때는 새벽잠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 일어나 불을 켜니 아내가 투덜대며 돌아눕는다. 사람 참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느냐며 함께 걱정해주는 시늉이라도 했다. 요즘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귀찮아한다. 이러다가 혹시 몸이라도 아프면 아예 무시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갑자기 서글퍼진다.

아이들 방을 들여다본다. 고3인 큰놈은 수능이 몇 달 안 남았는데, 공부는 쥐꼬리만큼 하고, 잠은 꼭 8시간씩 잔다. 아주 푹 잔다. 팬티 바람으로 퍼져 자고 있는 녀석의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내 마음만 더 심란해진다. 초등학생인 막내 녀석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요즘 이 녀석만이 내게 위로가 된다. 자고 있는 막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아이들 방에서 나온다. 부엌과 거실을 오가고, 소파에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동트기를 기다린다. 신문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안팎의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초조해하며, 수면장애, 불안, 두통, 피로 등이 동반되는 이런 종류의 증상을 흔히 ‘신경쇠약’이라고 한다. ‘신경쇠약’(neurasthenia)이란 표현을 최초로 정신의학의 전문용어로 사용한 미국의 내과의사 조지 M. 비어드는 이 증상의 원인을 문화변동으로 설명한다.

비어드가 지적하는 가장 결정적인 문화변동의 내용은 삶의 속도다. 19세기 전신, 철도, 증기기관 등으로 인한 삶의 속도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고, 그 결과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18세기에 비해 100배나 많아졌다. 빨라진 삶의 속도와 격렬해진 경쟁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부적응 현상이 바로 신경쇠약이다.

비어드가 경고한 19세기의 속도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속도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경험한다. 내 삶의 속도를 따라가기도 바쁜데, 남의 삶에도 쉴 새 없이 개입해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문자, 이메일이 계속 날아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트위터로 전해오는 수십, 수백명의 남의 이야기를 매번 확인해야 한다. 이 첨단기기의 진화를 단 몇 달이라도 모른체하면 바보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몸은 갈수록 느려진다. 노안으로 인해 신문 한 장을 보려 해도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아주 공사가 다망하다. 가까운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해 끙끙대는 일도 잦아진다. 휴대폰을 사용한 이후로는 제대로 외우는 전화번호도 없다. 이런 낡은 아날로그적 신체로 급변하는 21세기적 삶의 속도를 쫓아가려니 그토록 힘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정신없이 빨리 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삶과 마음의 속도의 불일치로 생기는 문화병의 치료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걷기’다. 수백만년에 이르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걷는 속도’에 적응해 발달해왔다. 감당하기 어렵게 빠른 삶의 속도는 불과 지난 몇백년 동안의 일일 뿐이다. 인류 역사를 하루로 보면 겨우 몇초 전에 시작된 변화라는 이야기다.

요즘 그래서 다들 ‘올레길’ 등을 찾아다니며 걷느라 난리다.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삶의 속도를 회복하고 싶은 까닭이다. 내가 최근에 찾아낸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맨발로 걷는 거다. 얼마 전, 가까운 산을 찾았다가 맨발로 걸어봤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흙의 느낌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그저 한 시간 남짓 걸었을 뿐인데, 그날 밤 더없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이 들 때, 잠의 나락에 한없이 떨어지는, 아주 기분 좋은 느낌도 되살아났다.

아침신문보다 일찍 깨는 새벽이 자꾸 늘어나 괴로운 이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꼭 권하고 싶다. 맨발로 걷기. 온천보다 더 좋다. 새벽에 자꾸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세상에 없다.

 

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