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서도 농담을 하고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쿨하게 가고 싶다.
의연하게 인격을 지키고 통증을 다스리고
칭찬받는 환자이고 싶다.
난처한 물음도 안 던지고
回診이 늦어도 불평하지 않고
超然하고 싶고, 물러나 있고 싶고,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
누가 한 세기를 더 살다 가는가.
누가 예술작품을 위해 순교하는가.
저 건강한 세상에 장애를 느끼는 이가 한둘이든가.
불 보듯이 꺼진 불을 만져서 재차 확인하듯이
그런데 왜 그것이 나는 이렇게 어려운가.
그것이 나는 왜 안 되는가.
왜 안 좋아졌다고 삐치고, 차도가 있다는 그 말을 듣기 원하는가.
아내의 표정을 훔쳐보고
문병객의 눈길로 바로 치어다보기 어려운가.
왜 이런 걸 적어 새로운 무덤을 또 짓는가.
마음의 거처? 슬픔의 집적소?
왜 쿨하지 못하고 왜 농담도 못넘기는지.
♧타들어 가는 촛불위에 선 삶과 죽음
* 시인은 2011년.4월 대장암으로 소천.
세상을 자기가 처한 곳과 다른 모든 곳으로 二分해서 느끼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假令 병이 危重한 사람들, 생의 버팀막이 얇아진다 싶으면,
여태(지금까지.아직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속해 있던 세계가 점점 멀어져 及其也(마지막에 가서는) 낯설게 느껴지고,
그 고립감이 병환 자체만큼이나 고통스럽고 두려울 테다.
'초연하고 싶고, 물러나 있고 싶고, 객관적으로 보고 싶은데', 그런데 안 된단다.
의사와 가족의 안색을 살피고 눈치만 보게 된단다.
'저 건강한 세상에 장애를 느끼는 이가 한 둘이든가',
자기를 위로해 보지만 위로가안 된다.
'누가 한 세기를 더 살다 가는가', 참으로 의연하고 또 의연하고 싶은데!
<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5 >
이 시를 읽다 보니 엄마가 그리워진다. 암의 고통과 싸우는 엄마는 어느날 갑자기 싸나워지셨다.
밥 잘 먹는 내가 너무도 이기적으로 보여진 엄마의 눈빛 따라 당신이 두고 가야하는 자식에 대한
惻隱한 눈빛도 때론, 무서운 눈빛으로 冷情(태도가 정다운 맛이 없고 차갑다)한 현실과 타협할 수 있겠느냐는 모정의 눈빛...
간간히 슬픔 넘어 고갯길가야하는 어미에 고독한 눈빛을 마주 할 때면, 나는 아무 말 없이 '엄마 많이 아퍼'라고만 했지.
잠 잘 자는 자식을 부러운 듯 보여지는 눈과 마주칠 때면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엄마가 떠나신지도 벌써 9년, 엄아의 곪아가는 마음을 나는 얼마나 알았을까?
손톱 만큼도 몰라준 딸자식이 나인 거 같아 아린 마음이 손끝에서 시려온다.
엄마도 눈빛이 꺼진 불처럼 이랬을 텐데, 그때 따뜻하게 보듬어 드릴껄...
내 앞가림에 지쳐 허우적거리는 모습만 보인 것 같아 중년이 되어가는 내 머리속이 뜨거워진다.
그래 한마디 불러본다. '엄마 거긴 어때?'
< 어느 딸의 고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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