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2013.08.04/제25권 31호>

꿈 꾸는 소년 2013. 9. 20. 12:20

<롬 8:26~27> 

 

 □ 우리의 軟弱함

 

 오늘 본문은 위리 자신의 연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니"(26절a) 여기서 연약함이란 '힘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기력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연약함'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 보면 '연약함'들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인간은 많은 연약함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인간의 약함을 '피조물다움'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정말 연약한 존재입니다. 육체적으로도 보면 강한 것 같지만 떨어지면 바싹 깨어지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우리의 의지도 정말 연약합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마음먹은 지 삼일도 못되어 흐지부지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마음도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마음하나 추스르기도 정말 쉽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유혹에도 약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적으로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연약함'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연약함으로서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7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우리의 약함을 이야기하면서 왜 우리의 기도를 擧論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약할 때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하든지, 영적으로 연약하든지, 연약해졌을 때 가장 많이 영향을 받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은 기도를 공격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님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내 의자가 얼마나 약하고 내가 영적으로 연약한 자인지 성령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 안에 찾아 오사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고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위로자, 대언자, 돕는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를 아시기에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찾아오셨습니다.

 

 □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

 

 그런데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안으십니다. 방관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26절a) 인생을 살다보면 연약함을 알지만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찾아오신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연약하지 않았다면 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찾아오셨겠습니까?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머물러 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연약이 성령을 머물게 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십니다.(11절)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우리의 죽은 몸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찾아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할 때 여기서 도우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도우신다는 원어적 의미는 '함께 담당한다' '함께 맞잡아 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짐을 지고 함께 손을 마주 잡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성을 가진 나의 힘으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고 감당할 수 없기에 성령님께서 함께 담당하심으로 그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강한 자로 만들어 연약함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을 그대로 놓아 둔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 성령은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가?

 

 첫째,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되 우리의 연약을 직접 게거하는 방식으로 도우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런데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저는 이 기도를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나요? 흘리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는지 모세혈관이 터져 그 피가 땀과 함께 몸 밖으로 흘러나올 만큼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도우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심으로 도우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사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절) 우리는 우리 안에 죄성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기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서로의 생각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구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을 따라 기도하십니다. 만일 성령께서 우리의 원함을 따라 기도하신다면 그분은 우리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도 때문에 비참해 질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왜 성령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실까요? 왜 전능하신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아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실까요? 그것은 기도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이 주어지는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은 언제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성령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정말 연약한 자들입니다. 보기보다 마음도 연약하고 의지도 약하고 질병에도 약한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 연약함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번도 당신의 연약함을 나무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 안에 보내주셨고 지금 우리를도와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울며 탄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도 함께 울며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내가 괴로워할 때 나보다 더 괴로워하시며 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