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제27권 4호/2015.1.25>

꿈 꾸는 소년 2015. 2. 13. 12:02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321P>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유럽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일 뿐만 아니라 감옥과 깊은 연관이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의 감옥에서 찬양하며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고 모든 매인 것들이 벗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자결하려고 하였던 간수와 그 가족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간수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빌립보교회는 감옥과 깊은 관련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크게 기뻐함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래서인지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계속적으로 기뻐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도 기뻐하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빌립보서는 4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총 104절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분량의 편지입니다. 하지만 이 빌립보서 안에는 '기쁨'이나 '기뻐하라'라는 단어가 18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계속적을 "기뻐하라, 기뻐하라"를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어디에서 썼습니까? 로마의 감옥에서 썼습니다. 감옥은 어떤 곳입니까? 인격이 없는 곳입니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매입을 당하여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감옥 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 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기뻐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살전5:16절에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뻐하는 것은 기뻐하면 좋고 안 해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일 뿐만 아니라 嚴危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하고 憤痛터지는 일이 많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이 더 많습니다. 이해되는 일보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사업의 실패, 인간관계의 갈등,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 슈퍼갑의 횡포, 수많은 죄의 충동과 유혹,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나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계략 이 모든 것들이 하루에도 수 없이 우리 안에 분노를 일으키고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기뻐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그러면 누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누가 내 느낌과 감정을 뛰어넘어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의 벽을 뛰어넘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주 안에" 있는 자 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a)

 그래서 사도 바울은 3:1절에서도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4:10절에서는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도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주 안에 있는 자는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바로 주 안에 있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주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주님과의 연합을 통한 관계를 말합니다. 늘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생활을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신랑과 신부의 관계, 종과 주인의 관계, 목자와 양이 관계, 친구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 주님과 신비한 관계가 맺어집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실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무엇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할까요? 연합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되려면 한 몸이 되어야 하듯이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계3:20) 이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사건 보다 더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이, 절대자인 하나님이 내 몸을 성전 삼고 내 안에 거처를 정하며 거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2천 년 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원하여 내 안에 내가 그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신비스러운 연합이 이루어지고 이런 놀라운 관계가 맺어집니다.

 

 □ 왜 주 안에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첫째는, 주님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이 엡6:1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어둠의 세상 주관자인 사탄, 마귀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세상에 있는 자인 사탄 마귀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크다는 말은 사이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사탄마귀보다 훨씬 강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볼 때 우리 주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사탄 마귀는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역적으로도 보면 우리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이 되사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완벽하게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커도 문제의 해결자이신 우리 주님보다 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크고 어려워도 죽음까지 정복하신 우리 주님보다 클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어떤 상황도, 어떤 문제도, 어떤 어려움도 우리를 괴롭히는 그 어떤 인간도, 심지어는 죽음까지라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자는 상황과 환경의 벽을 뛰어 넘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이 주시는 능력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능력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文脈的으로 보면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자족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누구든지 자족의 능력을 갖게 되고 그 자족의 능력을 갖게 되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기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족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잘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족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기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주 안에서 자족의 비결을 배우고 자족의 능력을 가져 모든 상황 속에서도 모든 성도들이 주 안에서 自足의 비결을 배우고 자족의 능력을 가져 모든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祝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