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0:17~21>
□ 칠십인 전도의 기쁨
본문은 전도를 위해 떠났던 70명의 전도단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전도 보고를 하는 장면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7절). 전도를 떠났떤 70명의 전도인이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왜 70인 전도인은 그토록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전도 보고를 하였을까요? 그것은 귀신들의 항복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항복하더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음을 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였을 때 더러운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70인 전도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신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귀신들이 항복하였다는 이 사실을 통해 전도가 가장 치열한 영적전투으 현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항복이라는 말은 아무데서나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전투에서만 쓸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가장 치열한 영적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사슬에 매여 불타는 지옥을 향하여 끌려가는 영혼을 구원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70인 전도인이 돌아와 흥분과 감격과 기쁨으로 귀신들이 항복 소식을 전할 때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8절). 예수님은 그들이 나아와 귀신의 항복 소식을 말하기 전에 이미 복음을 전하는 전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내가 보았노라"는 말씀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우연히 어쩌다 본 것을 말함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뚫어지게 집중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누군가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사람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그 영적 전투의 현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결코 나 혼자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영적 전투의 전장을 뚫어지게 발보시는 주님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핍박과 멸시와 외면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 주님이 주신 권능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19절). 왜 예수의 이름을 말할 때 귀신들이 그들 앞에서 항복을 하고 떠나갔습니까? 주님께서 복음을 들고 나아가 전하는 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오는 뱀과 전갈은 사탄과 그를 따르는 졸개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뱀과 전갈을 밟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밟는다는 것은 곧 승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하는 권세와 능력을 주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주었으니"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승리하신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너희에게" 당시의 70인 전도단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에게 이 권능을 주셨습니다. 미래에 어느 순간이 아니라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권능을 주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엄청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 구원의 기쁨
주님은 귀신들의 항복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에게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절). 이 말씀은 귀신들의 항복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필요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의 증거로 인한 기쁨도 아닙니다. 사역의 열매로 인한 기쁨도 필요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으로 말미암는 기쁨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보다 더 엄청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곧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구원을 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구원을 받았다는 그 사실,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하여 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 성령으로 기뻐하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21절a). 예수님은 성령을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시거나 탄식하셨다는 내용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직접 우수셨다는 기록은 딱 한 곳 밖에 없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데 여기 "기뻐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카이레테'입니다. 이 말은 그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껑충껑충 뛰면서 온 몸이 떨릴 정도로 크게 기뻐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예수님은 통상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껑충껑충 뛰면서 온 몸이 떨릴 정도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왜 그렇게 온 몸이 떨릴 정도로 성령으로 크게 기뻐하셨을까요? 복음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까? 전도를 마치고 돌아온 70인 전도자들의 보고를 받으신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복음의 증거로 인하여 귀신들이 항복을 당하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증거를 통하여 귀신은 항복을 당하고 죽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아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을 인하여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귀신들이 항복하고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온 몸이 떨릴 정도로 기뻐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최대의 위기는 핍박이나 환난 어려움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위기는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고 성령으로 인한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안에서 이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증거를 통하여 귀신들이 항복을 당하는 사역의 기쁨, 나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구원의 기쁨, 그리고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 안에 구원의 기쁨이 없다면 다윗처럼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역의 기쁨이 없다면 사역의 현장으로 나아가십시오.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귀신들이 항복당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증거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때 우리 주님의 성령으로 기뻐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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