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4:5>
□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는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명령에 이어서 곧 바로 "너희 寬容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너희 관용을 누구에게 알게 하라" 했습니까? "모든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관용이란 사람에게만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에 이어 곧 바로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가 항상 기뻐하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무엇이 가장 힘들던가요? 무엇이 가장 나를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하고 마음 아프게 하던가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이 갈등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힘이 듭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을 통해 기쁨을 얻기도 하고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서 힘과 용기를 얻기도 하지만 사람 때문에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이 주님이 주신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그것도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가족 주의 한 사람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의 한 사람이, 직장 동료주의 하나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고 내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빌립보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빌4: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교회 내에서 헌신적으로 수고하던 두 여성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슨 문제 때문인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갈등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의 마음에 충만하던 기쁨을 삼켜버렸고 빌립보교회 공동체에 상처를 남기고 모두를 근심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까지도 감옥에서 그 사실을 근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성도의 기쁨을 빼앗고자 성도들을 이간질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마음을 상하게 만듭니다. 서로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서로 오해하고 서로 관계가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기쁨을 빼앗아 가려는 사탐의 전략입니다.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세 알게 하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인간관계의 갈등을 극복하고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인간관계의 갈등의 처방으로 관용을 강조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사전을 보면 관용이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에 있어 관용이란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 내 권리를 내려놓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마음의 상대를 용서하며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갈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의 갈들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본질적인 문제가아니라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갈들의 이유는 대부분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인하여 서로 갈등하고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비본질적인 문제로 인하여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용이 어렵습니다. 아무리 비본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내 권리를 내려놓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상대를 용서하며 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소수의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죄성을 가진 우리 안에는 이런 죄성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용서가 아니라 보복하는 것입니다. 더 강하게 더 크게 복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관용은 결코 우리의 성품과 修養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할 수 있을까요?
□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것은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죽어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이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의 내 인생의 날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히9:27; 마16:27) 그런데 그날 그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 서기 위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용도 우리 주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 안에 있는 자만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공의로우신 주님의 심판을 의식하는 자만이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자만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자만이 내 권리를 내려놓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상대를 용서하며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용서를 할 수 있습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다 용서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다 용서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가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내 권리를 내려놓고 품을 수 없는 사람까지 품을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 하나님이 사랑을 경험 자입니다.
□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그래서 예수님은 마18장에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그러데 그것을 갚지 못하자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빛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탕감받은 자가 나가다가 백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그 동관이 "조금만 참아주시면 갚겠습니다."라며 사정을 하였지만 허락지 아니하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는데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탕감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 나오는 일 만달란트 빚진 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한 마디로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가치는 일만 달란트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용서해 주어야 할 가치는 그것이 아무리 커도 주님이 나를 용서해 주신 것에 비하면 백 데나이론에 불과합니다. 누군가 죽도록 나를 미워하고 나에 대하여 상처를 입혔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에 비하면 그것은 60만 분의 1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만이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누가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입니다. 누가 나의 권리를 내려놓고 나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그 사람을 따뜻한 마음오로 품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서야 할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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